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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600332
한자 壬辰倭亂
영어공식명칭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영어의미역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영어공식명칭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이칭/별칭 7년 전쟁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순천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590년 7월 - 임진왜란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 전국 통일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2년 4월 14일 - 임진왜란 고니시군 부산포 침입

[정의]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전쟁

[역사적 배경]

조선 초기에 이루어진 국방체제가 무너져 가고, 남해안 일대 왜구의 침략과 두만강 일대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여진족의 침입으로 이이(李珥)는 남왜북호(南倭北胡)[남쪽의 왜구와 북쪽의 오랑캐]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으나 조정의 갑론을박 속에 군사력 강화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는 혼란하였던 전국시대를 통일한 후 오랜 기간 전쟁을 통해 얻은 제후들의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켜, 내세를 안정시킴과 동시에 대륙 침략이라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이에 대마도주에게 조선 침공의 뜻을 표명하였고 조선에 사신을 보내 ‘가도정명(假道征明)[명나라를 정벌하는데 길을 빌린다는 것]’을 통보하였다.

[경과]

1592(선조25)년 4월 14일, 일본군의 대군이 침략을 시작하였다. 일본은 대군을 9번대로 나누어 침략을 개시하였다. 부산 앞바다에 도착한 일본군은 곧바로 부산포에 침입하였다. 부산진첨사 정발(鄭撥)은 일본군과 맞서 싸웠으나 패하여 전사하였다. 일본군은 이어 동래부를 침공,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또한 분전하였으나 전사하였다.

조선 정부는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삼아 내려보냈으나 상주에서 대패하였다. 신립(申砬) 또한 도순변사에 임명되어 일본군을 막으려 했지만, 충주 탄금대에서 전멸하게 되었다. 잇따른 패전에 조선 정부는 개성, 평양으로 옮겼고 계속된 적의 북침 소식에 의주까지 가게 되었다.

약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한 일본군은 승승장구로 북진하였다. 1592년 6월에는 평양까지 점령하면서 전쟁의 승기는 거의 일본군으로 넘어가는 듯하였다. 그러나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과 의승군의 봉기, 남해안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을 필두로 한 수군의 활약으로 인해 전황은 알 수 없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벌어지기 전부터 일본의 침략에 대비한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은 첫 출격인 옥포해전부터 합포·당포·사천·당항포·한산도·부산포 등에서 연전연승하였다. 수군의 활약으로 인해 일본군의 보급로가 끊겼고 전라도가 보전되었다.

전쟁이 발발한 이후 전국 각지에서 많은 의병이 일어났다. 호남 역시 김천일(金千鎰)의 나주의병, 고경명(高敬命)의 전라도 엽합의병, 장성의 남문의병, 보성의 전라좌의병, 화순·광주의 전라우의병 등 전라도 5대의병이 잇따라 봉기하였다. 이들은 향토방위를 목적으로 활동한 향보의병이 아닌 국가방위를 목표로 둔 근왕의병의 성격을 가졌다. 나주의병은 한성 탈환을 위해 경기도까지 진군하여 수원·강화 등지를 거점으로 삼아 활동하다 2차 진주성전투 때 남하하였고, 고경명 휘하의 전라도 연합의병은 북상 도중에 금산에서 전투를 펼치기도 하였다.

의병과 관련하여 순천 지역에서는 장윤(張潤)이 주목된다. 무관출신인 장윤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 3백 명을 모으고 순천부를 지키고 있었는데, 수군의 활약으로 순천읍내가 해상에서의 위협에서 안전해지자 북부 산간지역에서의 의병 활동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전라좌의병에 합류하게 되었다. 당시 문인 출신 임계영(任啟英)을 의병장으로 한 전라좌의병은 무관 출신인 장윤의 합류로 병력 규모나 의병의 전략구성 등 실전에서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전라좌의병에 합류한 장윤은 선봉장으로서 전선에서 활약하였다. 특히 1592년 12월에 있었던 성주 개령지역 수복 전투와 1593년 6월에 있었던 2차 진주성전투에서 큰 활약을 하였다. 2차 진주성전투에서 최후까지 분전하다 전사한 장윤은 현재 진주 창렬사와 순천 정충사에 배향되어 있다.

수군과 의병의 활약은 일본군의 북진을 저지하였다. 또, 중국에서 명의 군대가 조선에 파병되어 평양성을 수복하자 일본군은 서울로 퇴진하였다. 일본군은 명군을 벽제관에서 저지하였으나 행주산성에서 전라감사 권율(權慄)과 의승장 처영(處英)의 휘하 군에게 패배하였다. 계속된 악재에 전의를 잃은 일본군은 마침 명군이 화의를 제의하자 전군을 남하시키고 화의 진행을 기다렸다. 이렇게 임진왜란은 1593년 6월 2차 진주성전투를 마지막으로 1596년까지 약 3년 동안 휴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조선을 배제한 명과 일본의 화의가 결국 결렬되었고 일본은 조선을 재침하면서 정유재란이 발발하였다. 1597년 7월 15일 일본 수군이 칠천량에서 원균의 조선 수군을 대파한 이후 본격적으로 북상하였다. 임진왜란 초기와 다르게 정유재란기에 일본군은 먼저 전라도를 점령한 뒤 북상하는 작전을 구사하였다. 이에 따라 전군을 좌·우군으로 나눈 뒤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의 우군은 전주로,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좌군은 남원성을 공략하였다. 남원과 전주를 점령한 일본군은 일부 군사만이 북상하였고 나머지는 전라도의 주요 지역에 주둔하였다. 이때 호남 민중들이 일본군에게 당한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일본군은 상륙하자마자 약탈과 살인을 자행했다. 특히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전공의 증거인 코를 베어 갔다. 그 대상에는 군사들뿐만 아니라 부녀자들과 어린아이들을 포함한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북상한 일본군은 직산에서 명군에게, 회덕현에서 충청병사 이시언(李時言) 휘하의 군대에 막혔다. 또 원균(元均)의 조선 수군을 물리치고 진군하던 일본 수군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된 이순신의 조선 수군에게 명량에서 패배하여 북상이 저지되었다. 이에 일본군은 군사회의를 통해 남하를 결정하였다. 남하한 일본군은 남해안의 주요 거점에 성을 쌓고 주둔하기 시작했다. 이 때 성이 지어진 곳은 울산, 양산, 창원, 고성, 거제, 사천, 남해, 순천으로 총 8개이다. 그 중에서 순천에 있는 왜교성은 울산 도산성, 사천 선진리왜성과 함께 일본군의 3대 거점이었으며, 8개 거점 중 유일하게 전라도에 있다. 이는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점령하여 보급로를 확보한 이후 다시 북상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은 것이다.

일본의 주력군 중 하나였던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의 군대가 순천 왜교성에 주둔하게 되었다. 왜교성에 주둔한 일본군은 약탈과 살인을 자행하였다. 그러면서 투항한 백성들에게는 민패를 발급하여 곡식을 나누어주고 약탈에서도 제외하는 등 특혜를 주는 대신에 세금과 부역을 부과하게 하여 백성들을 교화시키기도 하였다. 이는 일본군이 장기전을 계획한 가운데 역시 호남지방을 온전히 장악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한편 일본군의 노략질을 참지 못해 항쟁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초기와 다르게 대규모의 군사조직을 구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각 고을의 지역방위를 위한 향보의병이 주를 이루었다. 순천에서는 훈련첨정이었던 박이량이 가족을 잃은 다음 복수의병을 일으켜 주암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과를 올렸고, 의병장 조희익과 도원수 별장 김운성 등은 순천이나 낙안 등지에 있던 일본군을 상대하였으며 조선인 포로들도 구출하였다. 심지어 연약한 부녀자들도 저항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1598년(선조 31)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일본군은 철수를 결정하였다. 조선과 명의 연합군은 이미 일본군의 주요 3거점인 순천, 울산, 사천을 육지와 해상으로 동시에 공격하는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을 계획하였는데, 이와 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철군하는 일본군을 추격하는 방식으로 전환하였다. 특히, 순천 왜교성을 둘러싼 전투는 다른 두 지역과 다르게 수륙합동작전으로 구성되었다. 1598년 9월 20일부터 11월 20일까지 약 2개월간 치러진 왜교성전투은 명 제독 유정(劉綎)과 도원수 권율, 전라병사 이광악(李光岳)을 필두로 한 서로군과 명 도독 진린(陳璘)과 통제사 이순신을 필두로 한 수로군이 합세하였고 조선 정부에서는 우의정 이덕형(李德馨)이 유정을 수행하였으며 군수책임자로 호조판서 김수(金睟)가 참여하였을 만큼 정유재란 최대의 작전이었다. 2개월간 이어진 왜교성전투는 크게 2단계로 볼 수 있다. 1단계는 1598년 9월 20일부터 유정이 퇴군한 10월 7일, 2단계는 10월 16일 육상군이 현지에 다시 진군한 이후에 노량해전을 앞둔 11월 19일까지이다.

1598년 9월 20일부터 시작된 전투는 10월 7일 유정이 왜교성에서 퇴군을 할 때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특히, 진린과 이순신의 연합수군이 전초기지인 장도를 탈환하여 일본군의 유일한 해상 진출로를 차단한 상황이었다. 이후에도 연합수군은 광양만 해상에서 계속해서 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끝내 왜교성은 점령하지 못하였다. 육상군의 지휘를 맡은 유정은 처음부터 결전의 의지가 없었다. 난공불락의 요새인 왜교성을 공략하기 위해선 육상군이 전면을 공격하는 동시에 해상에서 연합수군이 공격하여 왜교성 내에 있던 일본군을 분산시켜야 하는데, 육상군이 매번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일본군은 해상의 수군에 집중할 수 있었다. 가장 원활하게 작전이 수행되었던 10월 2~3일 사이의 전투 역시 왜교성을 공략하기 위한 공성전술이 갖춰지지 않아 연합군의 피해만 커졌다. 연합수군 역시 분전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거기다 왜교성 일대의 해안이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하여 갑자기 밀려 나간 조수에 전선들이 갯벌에 고립된 경우도 있었다. 또 명 내부의 지역감정으로 인한 상호 간 불화와 대립도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0월 1일 일본군 전체에 철군령이 내려졌다. 왜교성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게도 철수명령이 전달되면서 고니시 유키나가군은 철수작전으로 전환하였다. 조속한 철병을 원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유정과 은밀한 강화교섭을 진행하였다. 무혈로 왜교성을 탈환하고 그 전공을 차지하려 했던 유정과 이해가 맞으면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철병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하였다.

한편 고흥 나로도에 주둔하였던 연합수군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철수 소식을 듣고 광양만 묘도에 진을 쳤다. 유정과 결탁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철병의 약속을 받고 1598년 11월 12일 철병선을 띄웠으나 묘도에서 격파당했다. 11월 13일 역시 철병선을 보냈으나 장도에서 격파당했다. 그러자 고니시 유키나가는 진린에게 집중하여 뇌물공세를 하였다. 마침내 일본군의 소형선박이 남해 창선도에 집결해있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에게 당도하였다. 철병기일을 넘긴 고니시 유키나가는 당초의 계획과 다르게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구원군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1598년 11월 18일 시마즈 요시히로군을 주력으로 하여 고성에 주둔하던 다치바나 무네토라[立花統虎] 군과 남해에 주둔하던 소 요시토시[宗義智] 군이 주축을 이룬 일본군이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원하기 위해 광양만으로 향하였다. 이순신은 일본군이 당도하기 전에 요격하기 위해 노량해협으로 출진하였다. 19일 새벽 2시부터 정오까지 펼쳐진 치열한 전투는 일본군의 선박 2백여 척을 격파한 대첩이었으나 조선군 역시 통제사 이순신을 포함한 지휘관 10여 명과 명의 부총병 등자룡(鄧子龍)이 전사하는 등 많은 희생이 뒤따른 채로 전투가 끝났다. 조명연합수군이 시마즈 요시히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고니시 유키나가군이 왜교성을 탈출함으로써 정유재란은 막을 내렸다.

[결과]

7년간 벌어진 일본과 전쟁은 조·명·일 3국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전쟁터였던 조선은 경작지가 황폐화되었고 군공이나 납속책[재정난 타개와 구호 사업 등을 위하여 곡물을 바치게 하고, 그 대가로 상이나 벼슬을 주던 정책] 등은 기존의 사회 질서를 흔들었다.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고 문화재 손실 또한 막대하였다. 조선 정부는 이와 같은 일을 대비하기 위해 병제 개편과 무예 개량에 착수하였다. 난초에 이미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정예군을 편성하였고 지방에는 속오군을 두어 교관을 통해 무예를 가르쳤다. 또, 명의 원군 파병으로 인해 숭명사상(崇明思想)이 더욱 굳어졌으며 일본인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심이 높아졌다.

한편, 일본은 전쟁이 장기전으로 흘러 국민의 생활이 피폐해졌다. 또한, 일본 내의 제후들의 세력이 약화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또, 조선에서 포로로 데리고 온 도공이나 성리학자 등 문화적 측면에서 발전하였다.

명은 조선에 대군을 무리하게 파견하여 국력이 크게 소모되었다. 이때 만주의 여진족이 세력을 확대하여 명청 교체의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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