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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600336
한자 靑年運動
영어공식명칭 Youth Movement
영어의미역 Youth Movement
영어공식명칭 Youth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순천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인덕

[정의]

일제강점기 순천 지역의 학생, 노동자, 농민 등의 청년이 일으킨 반일운동.

[개설]

한국 근현대사에서 사회의 중추세력인 청년은 일제강점기에 다양한 진영에서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그 원동력으로 인해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들의 선도적인 역할이 바로 순천 지역에서도 있었다. 3.1운동 이후 문화 통치 아래 부분적으로 결사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1920년 순천에서는 청년 단체들이 결성되었다. 이들 청년 단체는 다양한 경향성을 보였고, 1920년대 순천 전역에서 그리고 광양과 여수 등지와 농민, 노동, 사회주의 운동과 연계 아래 전개되었다. 순천의 청년운동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적 경향성이 강화되어 지역운동을 선도하기도 했다.

[역사적 배경]

순천은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동부지역 교통과 문화 그리고 교육의 중심지였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왕래했고, 특히 많은 청년과 학생들이 순천에서 학업을 닦았다. 3.1운동 이후 통치정책의 변화에 따라 기독교, 불교, 천도교 등의 세력에 청년학생이 주도적으로 참가하면서 지역의 청년운동이 활성화되었고, 그 결과 다양한 대중운동을 전개하는 여러 요인을 제공하였다. 여기에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전국적 규모의 청년운동과 사회운동이 벌어지면서 그 영향을 받은 순천 지역의 청년운동이 전개되었다.

[청년단체의 조직과 활동]

1920년대는 청년 운동이 두드러지게 등장한 시기였다. 특히 청년이 단체를 형성한 내용을 살피게 되면 전남 지역의 사회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순천의 경우 순천청년회가 주목된다. 서병규, 이충호가 발기한 이 단체는 1920년 창립되었다. 창립총회에서는 서병규가 개회사, 이충호의 경과보고, 이영민의 취지설명이 있었다. 이들은 당시 순천친목계의 구성원으로, 실제로 순천친목계는 1918년 문화향상을 내걸고 조직되어 1923년 이름을 ‘순천친목회’로 변경하고 조직을 개편하였다.

이 가운데 순천청년회를 주도한 사람은 서병규, 김양수, 성정수, 이영민, 이창수, 박영진 등이었다. 순천청년회의 창립기 간부는 지주, 상공인, 교사, 기자 등의 지식인이었다. 아울러 별량면에는 지회가 있었는데, 이 지회는 1921년 4월 8일 창립되었다. 초기 간부는 지회장 심선현, 부회장 김인채, 총무 김학련 등이었다.

한말부터 순천에는 엡윗청년회, 면려청년회 등이 있었다. 먼저 기독교 계통의 청년단체인 순천기독면려청년회는 장로파 교회에 속하는 청년들의 신앙결사로 1918년 10월 15일 결성되었다. 이 조직의 힘은 3.1운동 때 발휘되어 3월 16일 순천읍에서 기독교청년들이 만세시위를 시도했다. 1920년대 초에는 순천 지역 기독교세력의 움직임이 활발했는데, 그 중심에는 순천기독면려청년회가 있었다. 이 조직 안에는 순천청년회의 김양수, 이창수, 정달조, 한태선 등이 활동했다. 한편, 감리교 교회에 속하는 청년들은 신창의법청년회에 결집되어 있었다.

볼교계의 청년신자들도 청년단체를 결성했다. 조선불교청년회 순천송광지회, 선암사 불교청년회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다른 청년단체로 순천청년구락부, 청안청년구락부, 순천유학생대회, 순천고학생상조회, 순천학우회, 순천운동구락부 등이 활동했다.

순천의 청년단체는 교육활동과 강연회, 토론회, 체육대회, 물산장려운동 등에 적극 참가했다. 순천청년회는 순천중학교 설립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에 가담했다.

1922년 말에는 농민단체가 결성되는데, 여기에 순천연학회와 순천무산자동맹회의 구성원이 가담했다. 1923년 6월 4일 결성된 순천연학회는 전남 최초의 사상단체이고, 1924년 1월 창립한 순천무산자동맹회는 1920년대 중반 순천 지역 반일투쟁의 핵심 조직이었다. 이들은 사상 단체인 화요회와 북풍회에 가입해 적극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면청년회와 노동청년회도 조직되었다. 1923년 쌍암청년회, 동초청년회, 1924년 황전청년회가 조직되었는데 주요 구성원은 지역 유지인 장년층이었다. 아울러 송광면에는 자강회, 쌍암면에는 전진회 등도 존재했다. 그런가 하면 순천노동청년회는 1923년 조직되었는데, 노동부분의 활동가 양성을 목표로 결성되었다.

대표적인 순천 지역 청년단체인 순천청년회는 1924년 사상대강연회를 열었다. 박영진이 사회를 보는 가운데 김양수가 연사로 등단하여 ‘무산대중운동도 유물사관에 따르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했다. 순천청년회는 1925년 7월 혁신총회를 통해 계급적 성향이 강화되었다.

순천 지역에도 여성단체가 조직되었는데, 1926년 1월 조직된 순천여자청년회가 대표적이다.

순천청년회는 전국적인 흐름에 따라 청년단체 연합회로 1925년 9월 전남동부청년연맹을 결성하였다. 여기에는 순천, 광양, 구례, 보성의 14개 단체가 참가했는데, 순천과 광양 단체가 중심이었다. 이런 전남동부청년연맹의 결성은 고려공청과 무관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과]

한편 1926년 말 청년동맹의 결성으로 청년운동의 방향이 재편되자, 1927년 10월 중순 전남동부청년연맹이 순천청년연맹으로 창립되었다. 설립 초기의 주요 구성원은 김광수, 고태우, 박영진, 이영춘, 한규성 등이었다. 이후 순천청년연맹은 1920년대 중반 이후 지역운동을 내용적으로 선도하는데, 민족적 청년운동의 성격을 외형적으로 갖고 있어서 민족주의적 경향의 각종 활동을 적극 추진했다. 그러나 1931년 이후 언론보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순천 지역의 청년운동은 세대공동체, 민족공동체, 계급적 성향을 띄면서 지역의 대중운동을 선도했다. 1930년대 이후 순천 지역의 청년운동은 비합법적인 반일투쟁의 내용을 갖고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어 갔다.

[의의와 평가]

순천 지역의 일제강점기 청년운동은 지역 전체 반일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쳤다. 지역의 농민운동과 학생운동은 청년운동적인 모습이 강세를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내용있는 반일투쟁을 이들 청년세력이 선도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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