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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600583
한자 朴蘭鳳
영어공식명칭 Park Nan-bong
영어음역 Park Nan-bong
영어공식명칭 Park Nan-bong
분야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남도 순천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이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부임|활동지 박난봉 활동지 - 전라남도 순천시
묘소|단소 박난봉 장군 묘소 - 전라남도 순천시 금곡동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순천박씨제각 - 전라남도 순천시 금곡동 지도보기
성격 무관
성별
본관 순천
대표 관직 정승|대광보국숭록대부|평양부원군

[정의]

고려 후기 순천 지역에서 활동한 호장이자 대장군.

[개설]

박난봉(朴蘭鳳)의 생몰년은 알 수 없다.

[가계]

박난봉의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순천박씨의 시조인 박영규의 후손으로 알려졌지만, 정확한 계보는 분명하지 않다. 고려 충숙왕 때 활약한 박숙정의 후손이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명문가로 성장하면서, 박영규-박난봉-박숙정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확립되었다. 이후 박난봉순천박씨의 중시조로 여겨지고 있다.

[활동 사항]

박난봉과 관련된 자료가 많지 않아 구체적인 활동상을 복원하기는 어렵다. 현재 남아있는 자료에서는 순천의 군장이었다는 기록과 벼슬이 정승(政丞)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이르렀으며,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전한다. 박난봉이 정승을 지냈고 평양부원군에 봉작되었다는 자료는 고려시대 사료에는 나오지 않는다. 문중 전승이나 전승을 바탕으로 발간된 『승평지』 등에서만 발견되고 있어 연구가 더 필요하다.

박난봉의 구체적인 활동상은 『강남악부』에 나오는 “순천의 군장이 되어서 인제산에서 마을 뒤편 진산에 이르기까지 성을 축조하고 그곳에 웅거하였다. 죽어서는 인제산의 산신이 되었다.”는 기록이 가장 구체적이다. 이 기록을 통해 고려시대 외적의 침입이 있던 시기에 군사적으로 활약했던 인물이라는 추측할 수 있다. 박난봉이 활동했던 시기는 몽골의 4차 침입 때로 생각된다. 아모간이 이끄는 몽골군은 1247년(고종 34) 8월 이후 충청도를 거쳐 전라도 방면으로 남하하여, 지나는 곳의 여러 성을 공격하면서 남부지역에까지 이르렀다. 박난봉은 이때 인제산에서 마을 진산을 잇는 산성을 수축한 다음 순천 지역민들과 함께 들어가 몽골군에 대항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외적의 침입에 대한 대응으로 인해 지역민들의 신망이 높아졌다. 그 결과 박난봉의 후손들은 이를 발판으로 점차 순천 지역의 주도권을 장악해 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고려 후기인 원 간섭기에는 중앙관료로 진출하기 시작했고, 고려 말과 조선 초에는 전국적인 수준의 명문가로 성장하였다.

[학문과 저술]

순천에는 박난봉 장군과 관련된 설화가 많이 남아있다. “인제산에 용마발터가 있는데, 박장군이 탔던 말의 발자국이다.”, “박장군이 인제산까지 말을 타고 휘휘 날아다녔다.”, “박난봉 장군이 던진 도끼가 떨어진 자리에 소(沼)[웅덩이]가 생겼다” 등의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또 난봉산에 아직도 정령이 있어 구름 끼고 비오는 날이나 달 밝은 밤이면 병마 달리는 소리가 골짜기를 진동했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이러한 설화는 당시 사람들이 장군으로서 박난봉이 보인 능력에 경외감을 갖고, 전설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박난봉에 의해 순천 지역민들이 몽골의 침입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았던 것이 그러한 경외감의 근원일 수도 있다.

[묘소]

박난봉 장군의 묘소는 순천시 금곡동[청수골 공마당]에 순천박씨의 제각과 함께 있다.

[상훈과 추모]

박난봉이 죽은 뒤에 인제산 산신으로 추앙받았기 때문에 인제산사에 모셔졌다. 이후 읍에서 주관하여 박난봉에게 제사를 올렸다. 박난봉은 향촌 공동체의 수호신으로 선정되어 모셔졌으며, 지역 향리들이 박난봉의 제사를 주관하였다. 순천김씨 시조인 김총의 성황사와 순천박씨 시조인 해룡산사의 건립에 이어 순천박씨 중시조인 박난봉의 인제산사가 잇달아 세워지는 것은 지역 주도권 경쟁, 혹은 주도권 확보과정으로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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