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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600613
한자 許亨
영어공식명칭 Heo Hyeong
영어음역 Heo Hyeong
영어공식명칭 Heo Hyeong
이칭/별칭 통지(通之),세수재(世守齋)
분야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남도 순천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89년연표보기 - 허형 출생
몰년 시기/일시 1564년연표보기 - 허형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05년 - 허형 승정원 좌부승지 추증
출생지 허형 출생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거주|이주지 허형 거주지 - 전라남도 순천시
묘소|단소 허형 묘소 - 전라남도 순천시 순광로 119-16[조례동 150]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세수재 - 전라남도 순천시 순광로 119-16[조례동 150]지도보기
성격 학자
성별
본관 양천

[정의]

조선 전기 순천 지역에 세거하던 양천허씨의 순천 입향조.

[가계]

허형(許亨)[1489~1564]의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통지(通之), 호는 세수재(世守齋)이다. 선대는 고려 때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한 허부(許富)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세종 대에 문과에 올라 현감을 지낸 모당(慕堂) 허질(許晊), 할아버지는 선절장군(宣節將軍) 회령포만호(會寧浦萬戶) 및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한 허예(許禮), 아버지는 성종 대에 문과에 올라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역임한 허온(許溫)이다.

[활동 사항]

허형은 고려의 명문가이고 조선 건국 이후에도 벼슬이 끊이지 않았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중종 때 여절교위(勵節校尉)를 지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일가인 허침(許琛)[1444~1505]이 죽고 또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정치적 박해를 피해 1526년 이후 장인 박증손(朴曾孫)[1496~1573], 동생 허영 등과 함께 순천 지역으로 낙향하였다. 순천 지역으로 내려온 후 벼슬과 명리(名利)에 뜻을 버리고 안빈낙도의 삶을 살았다. 순천 지역에 입향하였을 당시에는 순천의 토성(土姓)과 연결되는 기존의 사족 출신이 지역사회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내려온 허형의 학문과 언행은 순천 지역 사회에 영향을 주었고, 성리학 진작에 영향을 미쳤다. 허형의 언행과 학문에 대한 명성이 전해지면서 지역의 선비와 청년들이 수학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손들에게 청백한 가법을 이어받고 세속적인 출세를 바라지 말라는 의미의 ‘세수재(世守齋)’를 지어 거처하였고, ‘충효’ 두 글자를 대대로 지켜야 할 가법으로 유훈을 내렸다. 허형의 유훈은 후손들에게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으며, 양천허씨가 순천 지역을 대표하는 명문가문의 하나로 성장하는 기틀이 되었다.

[학문과 저술]

허형은 순천 지역에 낙향한 후 거처하는 건물에 ‘세수(世守)’라는 편액을 붙였다. 세수는 ‘대대로 지켜가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세수재기」라는 칠언시를 지어서 후손들에게 대대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였다.

「세수재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연동(蓮洞)의 방죽머리에 초정(草亭)을 지었으니 이제부터 거문고와 서책으로 노쇠한 나이 보내리라. 다만 청백한 가법(家法)을 이어 받을지니 무엇 하러 성명(姓名)이 청사(靑史)에 실리기를 구하겠나. 궤(几)에 기대어 멀리 남곽(南郭)처럼 바람소리를 듣고 벼슬을 쉬니 북산(北山)의 신령에 부끄럽지 않다오. 지난밤 꿈에 도원량(陶元亮)을 보았으므로 새로 지은 시로 묘지명(墓誌銘)을 대신하려 하네[蓮洞堤頭結草亭 琴書從此送頹齡 但將家法承淸白 何用時名載汗靑 隱几遙聞南郭籟 休官不愧北山靈 夜來夢見陶元亮 已把新詩代壙銘].”

[묘소]

허형의 재실인 세수재와 묘는 전라남도 순천시 순광로 119-16[조례동 150]에 있다.

[상훈과 추모]

허형의 증손자인 허일(許鎰)[1549~1593]이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 1등으로 책훈되자 승정원좌부승지로 추증되었다. 1972년 후손들이 원래의 자리가 아닌 허형의 묘소 앞에 세수재를 복원하였다. 또 허형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추모하는 단소를 마련하여 매년 11월에 배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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