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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600633
한자 沖止
영어공식명칭 Chung Ji
영어음역 Chung Ji
영어공식명칭 Chung Ji
이칭/별칭 복암(宓庵),법환(法桓),원감(圓鑑),보명(寶明)
분야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전라남도 순천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이종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226년연표보기 - 충지 출생
활동 시기/일시 1232년 - 충지 사원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234년 - 충지 예부시 장원급제
출가|서품 시기/일시 1254년 - 충지 원오국사 천영에게 출가
활동 시기/일시 1266년 - 충지 김해 감로사 주지 임명
활동 시기/일시 1269년 - 충지 삼중대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272년 - 충지 순천 정혜사에서 주석
활동 시기/일시 1286년 - 충지 수선사 제6세 법주로 등극
몰년 시기/일시 1293년 1월 10일연표보기 - 충지 사망
출생지 충지 출생지 - 전라남도 장흥군
학교|수학지 정혜사 - 전라남도 순천시 서면 정혜사길 32[청소리 716]지도보기
학교|수학지 순천 송광사 -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송광사안길 100[신평리 12]지도보기
성격 승려
성별
대표 경력 국사

[정의]

고려 후기 순천 송광사에서 국사를 지낸 승려.

[활동 사항]

충지(冲止)[1226~1293]는 송광사 16국사 중 제6대 국사이다. 전라도 장흥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위소(魏紹)이고 어머니는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 송자옥(宋子沃)의 딸이다. 휘(諱)는 원래 법환(法桓)이었고 자호(自號)는 복암(宓庵)이다. 충지는 17세 때인 1242년(고종 29) 사원시(司院試)에 들었고, 19세 때인 1244년 예부시(禮部試)에 장원급제하여 영가서기(永嘉書記)라는 벼슬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1254년(고종 41) 10여년의 관직생활을 그만두고 선원사 법주(法主)[법회의 주관자]로 있던 원오국사(圓梧國師) 천영(天英)[1215~1286]을 찾아가 출가하고 사미계(沙彌戒)[사미가 지켜야 할 열 가지 계율]와 구족계(具足戒)[불교 교단의 승려가 받는 계율로서 비구 250계와 비구니 348계]를 받았다. 이후 남쪽으로 유람하며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여러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수행하였다. 1266년(원종 7) 천영의 권유를 받고 김해 감로사(甘露寺) 주지가 되었다. 1269년(원종 10) 삼중대사(三重大師)에 올랐으며, 1272년(원종 13) 순천 정혜사(定慧社)에 머물렀다.

충지는 1273년(원종 14) 삼별초군의 대몽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원나라에서 관구병량사좌를 만들고 군량미 확보를 목적으로 조계산 수선사의 전답을 몰수하자 원나라 세조에게 「복토전표(復土田表)」를 올려 토지를 예전과 같이 복구하였다. 「복토전표」의 전문이 『조계산 송광사사고』에 전한다. 이로 인해 충지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1275년(충렬왕 1) 충렬왕의 요청으로 원나라 수도 연경(燕京)[현 베이징(北京)]에 가서 세조를 알현했다. 원나라 세조는 충지를 손님의 예로 맞아들여 금란가사(金襴袈裟)와 벽수장삼(碧繡長衫), 불자(拂子) 한 쌍을 하사하였다. 1276년 충지는 대선사를 제수받았다. 1284년(충렬왕 10) 순천 정혜사를 떠나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 머물렀다. 1286년(충렬왕 12) 천영이 입적하자 뒤를 이어 수선사 제6세 법주가 되어 7년간 주석하였다.

충지는 1293년(충렬왕 19) 1월 10일 새벽에 일어나 삭발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문인들을 불러 대담을 나누고 임종게(臨終偈)[고승들이 입적할 때 수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후인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말이나 글]를 읊은 후 조용히 입적하였다. 세수 68세, 법랍 39세였다.

[상훈과 추모]

충지는 입적 후 국사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원감(圓鑑), 탑호는 보명(寶明)이다. 승탑은 송광사 감로암에 세워져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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