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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600638
한자 慧諶
영어공식명칭 Hye Sim
영어음역 Hye Sim
영어공식명칭 Hye Sim
이칭/별칭 진각(眞覺),원조(圓照),무의자(無衣子),영을(永乙),최식(崔寔)
분야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전라남도 순천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이종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178년연표보기 - 혜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201년 - 혜심 사마시 합격
출가|서품 시기/일시 1202년 - 혜심 보조국사 지눌에게 출가
활동 시기/일시 1210년 - 혜심 수선사 제2대 법주 등극
활동 시기/일시 1214년 - 혜심 선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215년 - 혜심 대선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220년 - 혜심 단석사 주지 임명
몰년 시기/일시 1234년연표보기 - 혜심 사망
출생지 혜심 출생지 - 전라남도 화순군
학교|수학지 순천 송광사 -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송광사안길 100[신평리 12]지도보기
성격 승려
성별
대표 경력 국사

[정의]

고려 후기 순천 송광사에서 국사를 지낸 승려.

[활동 사항]

혜심(慧諶)[1178~1234]은 송광사 16국사 중에서 제2대 국사이다. 1178년(명종 8) 전라도 화순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최완(崔琬)이고 어머니는 배씨(裵氏)이다. 자(字)는 영을(永乙), 자호(自號)는 무의자(無衣子), 속명은 최식(崔寔)이다. 혜심은 24세 때인 1201년(신종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1202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조계산 수선사(修禪社)[현 순천 송광사]에 있던 보조(普照) 지눌(知訥)[1158~1210]을 찾아가 출가하였다. 1205년(희종 1) 가을 억보산(億寶山)[현 전라남도 광양시 백운산]에 머물던 지눌을 찾아가 선게(禪偈)를 바치고 인가를 받는다. 1208년(희종 4) 지눌혜심에게 수선사의 법석을 물려주고 자신은 규봉암(圭峰庵)으로 물러가 있으려 하였으나, 혜심은 사양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은둔하였다. 1210년(희종 6) 지눌이 입적하자 문도들이 희종에게 보고하여 왕명으로 수선사의 제2대 법주(法主)[법회의 주관자]가 된다. 혜심이 수선사 법주로 있는 동안 최씨 무신정권으로부터 귀의를 받았으며, 최고의 실권자였던 최우(崔瑀)[?~1249]는 두 아들 최만종(崔萬宗)과 최만전(崔萬全)을 혜심에게 출가시키기도 하였다.

1214년(고종 1) 고종이 즉위하여 혜심에게 선사(禪師)를 제수하고, 1215년에는 대선사(大禪師)를 제수하였다. 혜심의 비문에는 “승과를 거치지 않고 승직에 오른 사람은 혜심이 처음”이라고 하였다. 1219년(고종 6) 임금이 조서를 내려 지리산 단속사(斷俗寺) 주지에 임명하자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아 1220년에 단속사에 들어가 주지가 되었다.

혜심은 1234년(고종 21) 문인들을 불러 후사를 당부하고 제자 마곡(麻谷)을 불러 대담을 하다 미소를 머금고 가부좌를 한 후 조용히 입적하였다. 세수 57세, 법랍 32세였다.

[사상과 저술]

진각국사 혜심은 수선사 제2대 법주가 되어 보조국사 지눌의 저술을 정리하고 판각하였으며 수선사를 크게 일으켰다. 혜심은 간화선의 공안(公案)을 모아놓은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30권]을 편찬하고, 무자 화두의 참구를 주장하는 『구자무불성화간병론(狗子無佛性話揀病論)』을 저술하였다. 한국불교 간화선 전통에서 가장 널리 수행하는 ‘무(無)’자 화두는 혜심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만하다.

[상훈과 추모]

혜심이 입적 후 송광사 광원암(廣遠庵) 북쪽에 장사지내고 승탑을 세웠다. 혜심은 국사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진각(眞覺), 탑호는 원조(圓照)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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