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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601293
한자 韓國-僧寶寺刹松廣寺
영어공식명칭 Seungbosachal Songgwangsa Temple of Korea
영어음역 Seungbosachal Songgwangsa Temple of Korea
영어공식명칭 Seungbosachal Songgwangsa Temple of Korea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남도 순천시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이종수

[정의]

우리나라 불보·법보·승보의 삼보 사찰 가운데 승보에 해당하는 사찰.

[승보사찰, 순천 송광사]

순천 송광사는 우리나라 삼보사찰 가운데 승보사찰이다. 삼보사찰이란 불보·법보·승보의 사찰을 말하는데 불보사찰은 통도사, 법보사찰은 해인사, 승보사찰은 순천 송광사이다.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이 봉안되어 있기 때문이다. 순천 송광사는 고려시대 16 국사를 배출했기 때문에 승보사찰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창건설화]

신라 말 전염병이 전국을 휘감고 있을 때 혜린대사(慧璘大師)는 제자들을 데리고 수행할 곳을 찾고 있었다. 대사 일행 중에도 전염병에 걸린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길을 가는데 큰 연못가에 있는 돌부처를 보고 ‘문수보살님이 우리를 구하러 오셨구나.’고 생각하고, 그 돌부처 앞에 꿇어앉아 7일 동안 기도를 올렸다. 7일째 되는 날 밤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너는 이제 불법을 터득하였으니 더 배울 것이 없구나. 새로 절을 지어 중생을 구제하라.”라고 하였다. 대사가 꿈에서 깨어나 주변을 둘러보니 병에 걸렸던 제자들이 모두 건강을 되찾아 있었다. 대사는 돌부처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돌아서려는데 어떤 노승이 나타나 “당신에게 귀중한 선물을 전하라는 부처님의 분부를 받고 왔습니다.”라고 하더니 붉은 가사 한 벌, 향나무 불상 1구, 불두골(佛頭骨) 한 조각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전라도 송광산(松廣山)이 바로 이 부처님의 불두골을 모실 성스러운 땅이니, 대사는 그곳에 가서 절을 지어 중생을 구제하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혜린대사가 송광산을 찾아 절을 지으니 그 처음 이름은 ‘길상사(吉祥寺)’였다.

[제1·2·3차 중창과 정혜결사]

고려시대에 이르러 인종 대에 석조대사(釋照大師)가 중창하고자 했지만, 완성을 보지 못하고 입적하였다. 그 후 제1차 중창은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1158~1210]이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조직했던 9년 동안에 이루어졌다. 많은 인원이 수행하다 보니 전각과 요사채를 새로 건립할 필요성이 발생함에 따라 여러 전각이 건립되었을 것이다.

보조국사 지눌은 1182년(명종 12) 개경 보제선사(普濟禪寺)에서 개최된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석하여 동학 10여 명과 함께 정혜결사를 조직하기로 맹세한 바 있었다. 그 후 1188년(명종 18) 득재(得才)라는 선객(禪客)이 팔공산 거조사(居祖寺)에 머물기를 간청해옴에 따라 도반 4~5명과 함께 팔공산 거조사에서 정혜결사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2년 후에는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지어 유교와 불교, 출가와 재가를 가리지 않고 결사의 취지에 공감하는 이들의 동참을 호소하였다.

정혜결사를 시작한 지 10년이 되는 1198년(신종 원년) 봄에 지눌은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으로 거처를 옮겨 바깥 인연을 끊고 오로지 수행하였다. 이때 『대혜보각선사어록』의 “선정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또한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으며, 날마다 반연(攀緣)하는 곳에도 있지 않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라는 구절을 읽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 후 1200년(신종 3)에 순천의 송광산 길상사(吉祥寺)로 거처를 옮겨 정혜결사를 재조직하였다.

그런데 1204년 희종(熙宗)이 즉위하여 결사의 명칭을 ‘정혜(定慧)’에서 ‘수선(修禪)’으로 바꾸도록 명하고, 만수가사(滿繡袈裟) 한 벌과 함께 ‘수선사(修禪社)’라고 쓴 어필을 하사하였다. 인근 계족산(鷄足山)에 정혜사(定慧寺)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에 명칭의 혼동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이로부터 ‘정혜[결]사’에서 ‘수선[결]사’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정혜’가 곧 ‘수선’의 의미였기 때문에 이름만 바뀌었을 뿐 의미의 차이는 없었다. 수선사는 제2세 법주 진각국사 혜심에 이르러 무신정권의 귀의를 받으면서 크게 성장하였고, 제2차 중창이 있었다. 당시 최고 실권자였던 최우(崔瑀)는 두 아들 만종(萬宗)과 만전(萬全)을 혜심에게 출가시키기도 하였다. 이때 대중이 많이 늘어나자 건물을 새로 짓는 등 사찰을 중창하였다. 이후 수선사는 고려 말까지 16 국사를 배출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제3차 중창은 16 국사의 마지막 국사인 고봉국사(高峰國師) 법장(法藏)[1350~1428]에 의해 1400년(정종 2)부터 시작되었고 그 뜻을 이어받은 중인선사(中印禪師)가 완성하였다. 고봉국사 법장은 1396년(태조 4) 남쪽으로 유행하다가 낙안군 금수(金藪)[순천 금둔사로 추정]에 머물 때 꿈속에서 경치가 빼어난 곳에 사찰을 짓는 것을 보고 이튿날 곧장 조계산 순천 송광사로 가서 중창을 발원하였다. 1399년(정종 1) 궁궐에 가서 순천 송광사 중창을 요청하여 임금의 교지를 받았다. 1400년 7월, 임금의 교지를 들고 순천 송광사 대중에게 권면하여 공사를 시작하였다. 고봉국사 법장은 전각 두세 곳이 완성될 무렵 순천 송광사를 떠났지만, 중인선사가 고봉국사 법장 문도의 도움을 받아 완성하였다. 고봉국사 법장은 국가로부터 국사의 시호를 받지는 못하였지만, 이때 중창한 공덕을 기려 후학들이 명예국사로 추대하였다. 당시 90여 칸이 증축되었다고 한다.

[제4차 중창과 부휴계의 종찰]

조선 전기 순천 송광사에 관한 기록은 세종 대에 선종과 교종 각각 36사(寺)를 선정할 때 선종(禪宗)에 포함되었다는 기록을 제외하면 특별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이르면 부휴계의 종찰(宗刹)로서 순천 송광사는 불교사의 중심에 선다.

조선 전기 국가 공인의 불교 종파는 혁파되었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불교계는 청허계와 부휴계의 문파가 성립한다. 청허계는 청허(淸虛) 휴정(休靜)[1520~1604]의 문도를 말하며, 부휴계는 부휴(浮休) 선수(善修)[1543~1615]의 문도를 말한다. 청허계는 전국적으로 문도가 형성되어 휴정의 제자에서 4대문파가 형성될 정도로 크게 발전하였다. 이에 비해 부휴계는 전라도를 중심으로 문파가 형성되어 있었다.

순천 송광사는 정유재란으로 크게 피해를 보게 되자 지리산에서 수행하고 있던 부휴 선수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에 부휴 선수는 400여 명의 제자를 이끌고 와서 순천 송광사를 재건하니, 제4차 중창이었다. 이때 수백 칸의 건물이 중수되고 선원과 강원이 새로 개설되면서 보조 유풍을 계승한 부휴 문도의 종찰이 되었다.

부휴 선수의 제자 벽암(碧巖) 각성(覺性)[1575~1660]은 남한산성을 축성할 때 팔도도총섭으로서 공사를 감독하였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전라도에서 3,000여 명의 의승군을 조직하여 임금을 구하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진격하였다. 의승군이 도착하기 전에 인조가 청나라 군대에 항복했기 때문에 벽암 각성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 이후 부휴계의 문도는 순천 송광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불서 간행과 강학 활동을 통해 계파의 정통성을 강조하였다.

17세기 후반 백암(栢庵) 성총(性聰)[1631~1700]은 송광사사적비를 세우고 많은 불서를 간행하여 강학 전통을 세웠다. 그는 사적비를 통해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1158~1210]의 유풍을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부휴계의 정통성을 강조하였다. 또 1681년 중국 표류선에 의해 전래된 가흥대장경의 전적들을 구하여 복각하는 등 강학 활동을 선양하였다.

18세기 부휴계는 지리산 일대에서 문파의 영역을 확대하면서 부휴계의 종찰(宗刹)로서 순천 송광사의 위상을 더욱 확고히 다졌다. 그 과정에서 묵암(默庵) 최눌(最訥)[1717~1790]과 벽담(碧潭) 행인(幸仁)[1687~1748] 사이에 적전(嫡傳)[정통의 혈통에서 정통으로 이어받음]을 주장하며 갈등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한편 부휴계를 대표하는 순천 송광사묵암 최눌은 청허계를 대표하는 대흥사의 연담(蓮潭) 유일(有一)[1720~1799]과 심성(心性)에 관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때의 논쟁은 단순히 두 사람만의 논쟁이었다기보다는 두 계파 내지는 두 사찰의 경쟁으로 확대되어, 대흥사는 18세기 후반 국가로부터 표충사(表忠祠)를 공인받고 19세기 초 선교(禪敎)의 종원(宗院)을 표방하기에 이르렀으며, 순천 송광사는 부휴계의 종찰로서뿐만 아니라 19세기 초에 이르러 승보사찰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승보종찰의 위상 확립]

순천 송광사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16 국사의 사찰로 유명하였으며, 그 위상은 전라도를 대표하는 사찰이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이르러 삼보사찰 가운데 승보사찰로 인정받았다. 삼보사찰과 관련된 최초의 기록은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1774~1842]가 1828년에 지은 「연천옹유산록」이다. 여기에서 홍석주는 “불가에서 말하기를, 동국의 사찰에 삼보가 있으니, 통도사에는 부처님 두골(頭骨)이 있으므로 불보라 하고, 해인사에는 대장경이 있으므로 법보라 하고, 송광사는 승보라 하는데 보조 이후 16 국사가 배출되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연천옹유산록」의 순천 송광사 기록을 통해 19세기 이전에 송광사는 ‘승보사찰’이라는 관념이 형성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제5차 중창과 왕실 원당]

조선 후기 대부분의 승려는 생산과 금융 활동 등 자구책을 통해 사찰을 운영했지만 중앙과 지방 관아의 잡역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양인의 한 사람으로 전락한 승려들은 국가 수취체제의 일부에 편입되어 있었으므로 온갖 잡역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왕실과 인연 있는 사찰들은 왕실 원당으로 지정받아 잡역을 면제받기 위한 방법을 마련하였다. 지금까지 조사된 조선시대·대한제국시대 왕실 원당 총 248건 가운데 설립 시기를 알 수 있는 211건 중 112건이 17세기 이후 지정된 것이다. 시기를 알 수 없는 37건도 대부분 조선 후기에 지정되었다.

순천 송광사도 18세기 중반부터 20세기까지 약 150년간 세 차례에 걸쳐 왕실 원당으로 지정되었다. 1755년(영조 31)에 설치된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궁원당(毓祥宮願堂), 1886년(고종 23) 고종·명성황후·세자[후일 순종]의 복을 기원하기 위해 설치한 축성전(祝聖殿), 1903년에 고종의 기로소(耆老所)[조선시대에 나이가 많은 문신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 입소를 기념해 설치한 성수전(聖壽殿)이 그것이다. 육상궁원당은 약 50여 년 뒤인 1803년(순조 3)에 전라남도 담양군 용흥사로 이전되었다.

그 사이 1842년(헌종 8) 큰불이 나서 대웅전을 비롯한 거의 모든 건물이 소실되기도 했다. 순천 송광사 대중은 그 이듬해인 1843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856년(철종 7)까지 2,150여 칸을 다시 세웠다. 이것이 제5차 중창이었다.

왕실 원당인 축성전은 1909년(융희 3)에 폐지되었고, 성수전은 1908년(융희 2)에 폐지되었다. 그런데 1957년 10월 성수전 앞에 있던 관음전이 퇴락하여 철거할 때 관세음보살을 성수전으로 이안하고 전각 이름을 ‘관음전’이라고 하였다. 성수전으로 지정되었던 그 관음전은 지금도 남아 있다.

[제6·7·8차 중창과 조계총림의 성립]

제6차 중창은 설월(雪月)과 율암(栗庵)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1922년부터 1928년까지 퇴락한 건물을 수리하고 기와를 바꾸는 등 사찰 건물 전체를 새로 수리하였다. 그런데 1948년 여수 순천10.19사건과 1950년 6.25전쟁으로 다시 큰 피해를 보았다. 이에 1955년부터 금당(錦堂)과 취봉(翠峰)이 5년 동안 대웅전을 비롯하여 여러 전각을 중수하였으니, 제7차 중창이었다.

한편 순천 송광사는 1969년 조계총림으로 지정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에서 총림(叢林)이라 하면 선원·강원·율원·염불원 중 세 개 이상을 갖춘 종합수행도량을 의미하는데, 최초의 총림은 1947년에 성립된 백양사의 고불총림과 해인사의 가야총림이다. 그 이후 1969년 송광사 조계총림, 1972년 통도사 영축총림, 1987년 수덕사 덕숭총림이 차례로 설립되었으며, 2012년에 동화사·쌍계사·범어사가 각각 팔공총림·쌍계총림·금정총림으로 승격되었다. 총림에는 방장(方丈)이 수장이 되어서 주지를 임명한다.

총림이라는 말은 승려가 많이 모인 것을 비유한 표현으로 인도의 상가(saṃgha)에서 유래하였는데, 중국에서는 선종 교단을 총림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에는 선종 사찰을 총림이라고 하였지만, 조선시대 종파가 통폐합된 이후에는 많은 승려가 모인 곳을 총림이라고 표현하였다. 오늘날 총림의 개념은 해방 이후 성립된 것이다. 일제강점기 대처승이 늘어나면서 청정 가풍의 우리나라 고유 전통의 수행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종합수행처로서 총림을 건설하고자 했고, 그 결실이 백양사와 해인사의 고불총림과 가야총림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 후 한국을 대표하는 주요 사찰들이 총림으로 승격하였는데 순천 송광사는 16 국사를 배출한 대표적 수행도량으로서 1969년 조계총림이 되었다.

조계총림이 된 순천 송광사는 초대 방장이었던 승려 구산이 당시 주지 승려 현호에게 부촉(付屬)[불법(佛法)의 보호와 전파를 다른 이에게 맡겨 부탁함]함으로써 제8차 중창이 이루어졌다. 1983년부터 1990년까지 대웅전을 비롯하여 30여 동의 전각과 건물을 새로 지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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