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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601302
한자 韓國現代史-桎梏-麗水順天-事件-順天
영어공식명칭 Fetters of Modern Korean History, Yeosu·Sunchoen 10.19 Event and Suncheon
영어음역 Fetters of Modern Korean History, Yeosu·Sunchoen 10.19 Event and Suncheon
영어공식명칭 Fetters of Modern Korean History, Yeosu·Sunchoen 10.19 Event and Sunche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남도 순천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주철희

[정의]

1948년 10월 19일 여수 주둔 국군 제14연대 병사들이 제주4.3사건의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한 사건으로, 순천을 비롯한 전라남도 동부 지역에서 토벌군에 의하여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당한 사건.

[명칭 및 용어]

여수 순천10.19사건에 대해 여순반란사건, 여순항쟁, 여순봉기, 여순군란 등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으며, 1995년 국사교과서에 ‘여수 순천10.19사건’으로 편수 용어가 정해지면서 약칭 ‘여순사건’이란 용어가 대체로 일반화되었다. 이 글에서는 ‘여순항쟁’이라는 용어로 통일해 사용하기로 한다.

[역사적 배경]

1945년 해방은 민족의 기쁨이었지만 거의 동시에 한반도는 분단되었다.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민중의 염원과 달리 미군과 소련군이 점령한 한반도는 냉전이데올로기에 깊게 빠져들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승만은 1946년 4월 정읍 발언 이후부터 단독정부 수립을 노골적으로 주장하고 나섰다. 한반도 문제를 위한 모스크바3상회의 등이 열려 신탁통치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 결렬되면서 미국의 주도 아래 한반도 문제는 유엔[UN]에 상정되었다.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은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거를 발표하였다. 이에 제주도에서는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제주4·3항쟁이 발발하였다.

1948년 4월 3일 제주에서 발생한 무장봉기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해결되지 않아 이승만 정권에게 큰 짐으로 작용하였다. 1948년 4월 28일 평화협상을 주도한 김익렬 제9연대장이 파면되면서 제주도 진압작전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다. 미군정은 강경 진압작전을 전개하기 위해 경비대 총사령부 인사과장인 박진경 중령을 내세웠다. 박진경은 취임사에서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라고 천명했다. 박진경 연대장 취임 이후 제주도는 급격하게 희생자가 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제9연대 소속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 등은 1948년 6월 18일 새벽에 박진경을 암살하였다.

이후 최경록 연대장이 부임하고 1948년 10월 초순까지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미군임시고문단과 이승만 정부는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사령관 김상겸 대령, 제5여단 여단장]를 설치하였다. 즉 제주도의 골칫거리를 하루빨리 해결하고자 군대의 집중 투입을 결정한 것이다. 제주도 초토화작전 수행을 위해 여수 주둔 제14연대 1개 대대에 제주도 출동명령이 하달되었다. 제주도의 수많은 민간인 학살은 기존 경찰중심의 진압작전에서 군인 중심의 초토화작전으로 전환된 시점부터이다.

[경과]

제주도 출동 명령을 하달받은 여수 주둔 제14연대 병사들은 1948년 10월 19일 밤 비상나팔소리와 함께 봉기하였다. 제14연대 병사들은 제주도 출동은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라는 작전”으로 인식하고 명령을 거부한 것이다. 병사들은 순식간에 부대 전체를 장악하였다. 봉기군의 목적지는 지리산이었다. 지리산 일대에서 유격 투쟁을 목표로 하였기에 북상 기차를 타기 위해 여수역으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경찰과 교전이 있었다. 1948년 10월 20일 새벽 5시경에 여수 시내의 중요기관을 모두 장악하고 순천을 향한 북상 기차에 올랐다.

봉기군의 기차는 1948년 10월 20일 오전 8시경에 순천역에 도착하였다. 당시 순천에는 홍순석 중위가 지휘하는 1개 중대가 파견되어 경비를 맡고 있었다. 이들은 순천에 도착한 봉기군에 합류하였다. 지리산으로 입산하려 했던 봉기군은 순천역에서 더는 북상할 수 없어 순천 철도사무소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순천 시내로 진입하기 위한 공격을 준비하였다.

한편, 군인의 봉기 소식이 순천경찰서에 알려진 것은 1948년 10월 20일 새벽 1시경 여수 철도경찰 교환원에 의해서였다. 순천경찰서 양계원 서장은 긴급대책회의를 열어 경찰 비상소집을 하였으며, 제8관구경찰청[도경국장 김병완]에서도 사건 소식이 들어오자 대책을 논의하였다. 김병완 도경국장은 순천 인근에 있는 전라남도의 벌교, 보성, 고흥, 광양, 구례 등의 경찰서에 응원부대를 즉시 순천으로 파견할 것을 명하였다.

순천경찰서 양계원 서장은 순천으로 들어오는 철도를 절단하고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전략에 따라 비상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철도를 절단하는 일은 상부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 중대한 사항이었다. 하지만 위급한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 제8관구경찰청[현 전남경찰청]이 철도절단 승인을 내리지 않음으로써, 애초의 방어계획을 수정하였다. 순천경찰은 응원부대와 함께 전투부대로 재편성하여 제일선은 광양과 여수로 분파되는 광양삼거리[현 조곡삼거리]에 배치하고, 주력부대인 나머지 병력은 순천교 제방에 투입하였다.

순천교 제방을 사이에 두고 순천읍내로 진격하려는 봉기군과 이를 막으려는 경찰이 대치하였다. 봉기군은 죽도봉공원에 우세한 화기로 공격을 가하였으며, 광양삼거리 방면에서 경찰에 일격을 가하여 10여 명이 전사하였다. 광양삼거리에 배치된 경찰 방어선이 붕괴된 시간은 1948년 10월 20일 오전 10시 30분경이었다. 당시 순천교 제방을 방어한 병력은 각 지역에서 나온 응원부대로 약 500명의 경찰이었다. 1948년 10월 20일 낮 12시경에 경찰 응원부대는 봉기군에 밀리면서 대부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피신했다. 이 전투에서 180여 명이 사망하고 나머지 병력은 피신하였다. 1948년 10월 20일 오후 3시경 순천 읍내는 봉기군에게 점령되었다.

한편, 제14연대 봉기가 상급부대인 광주 제5여단에 알려진 것은 1948년 10월 20일 새벽 1시경이었다. 제4연대 부연대장 박기병 소령은 서울에 있는 육군총사령부와 미 군사고문단에 보고한 뒤 연대병력을 비상 소집하여 대기시켰다. 박기병 소령은 2대대의 1개 중대병력[중대장 김동희]을 긴급 출동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1948년 10월 20일 오전 10시경 순천에 도착하여 봉기군에 합세하고 말았다.

봉기군과 토벌군 첫 전투는 1948년 10월 21일 새벽에 벌어졌다. 박기병 부연대장이 이끈 제4연대 1개대대 병력 470여 명이 21일 새벽 학구(鶴口)[현 전라남도 순천시 서면 학구리]에 도착하였다. 양측은 서로 투항하라는 심리전을 벌이다 총격전으로 비화되었다. 이날 학구전투에서 토벌군은 1개 중대 병력을 포로로 잡았다.

육군총사령부는 1948년 10월 21일 반군토벌전투사령부를 광주에 설치하고, 토벌사령관으로 송호성을 임명하였다. 국군도 당시 15개 연대의 약 2만 5천명의 육군병력 가운데 38선을 방어하는 8개 연대를 제외한 7개 연대 총 12개 대대병력을 토벌군으로 투입하였다. 미군 측은 하우스만 대위를 비롯한 8명의 군사고문단원을 파견하여 신속한 진압에 앞장섰다. 이른바 ‘4F전술’을 수립하여, 적을 발견하여[Finding], 고정시킨 후[Fixing], 싸워서[Fighting], 신속히 끝낸다는 것이었다[Finishing]. 미 임시군사고문단장 로버츠는 송호성에게 보낸 훈령에서 “정치적·전략적으로 여수와 순천이 중요하기 때문에 가능한 빠른 시일 안에 탈환해야 한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1948년 10월 22일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이범석은 ‘반란군에 고한다’라는 투항호소문을 비행기로 현지에 살포하였다. 또한 순천과 여수 지역에는 제5여단장 김백일 명의의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토벌군의 군사작전은 1994년 10월 22일 군산에서 출동한 제12연대 2개 대대가 학구 인근에 도착한 오전 11시경부터 시작되었다. 토벌사령부의 첫 번째 목표는 순천을 탈환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세 방면에서 포위 공격하기 위한 작전부대를 편성하였다.

주공격은 제5여단장 김백일 대령의 지휘로 군산에서 출동한 제12연대 2개 대대[제12연대 부연대장 백인엽 소령]와 이미 학구 부근에 선발 출동한 제3연대 제2대대[대대장 조재미 대위]와 제4연대 1개 대대[이성가 중령]가 합동작전으로 학구를 장악하기 위한 전투로 시작되었다. 1948년 10월 22일 오후 3시경에 순천 학구를 장악한 토벌군은 제4연대 병력을 학구에 잔류시키고, 제12연대와 제3연대는 순천으로 진격하여 오후 3시경 외곽지역에서 봉기군과 대치하였다. 1948년 10월 22일 오후 4시경 남원 방면에서 도착한 제3연대 1개 대대병력[송석하 소령]이 가세하였다. 순천에는 2개 대대의 봉기군이 방어하고 있었다. 봉기군은 토벌군에 선전 혹은 타협안을 제시하며 토벌군 내부 붕괴를 유도하였다.

1948년 10월 22일 저녁 무렵 순천 북방 입구를 점령한 주공격 토벌군인 제12연대 3대대와 제4연대는 순천농림중학교 방면을 통하여 순천읍내로, 제12연대 2대대는 봉화산을 거쳐 동순천역 방면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제3연대는 봉화산을 거쳐 죽도봉 방면으로 공격을 시작하여 순천읍내로 진격하였다. 보조공격은 동쪽에서 최남근 중령이 이끄는 제15연대 1대대가 광양을 경유하여 순천을 향하기로 하였다. 또한 서쪽에서는 제5여단 참모장 오덕준 중령이 이끄는 제4연대 1대대 병력이 보성을 거쳐 순천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1948년 10월 23일 새벽 토벌군은 순천 주변의 산과 이른바 인민군사령부로 되어 있던 동순천역을 일시에 포위하고 박격포 사격과 정찰기의 지원을 받으며 장갑차부대를 선두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미 토벌군의 총공격을 예상한 봉기군은 인원이나 장비로 보아 대항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김지회 등의 봉기군 지휘관과 순천의 주요 좌익간부들로 구성된 주력부대는 광양 방면의 백운산과 지리산 줄기의 인근 산악지대로 도피하였다. 순천읍에는 총과 죽창으로 무장한 치안대, 민애청원, 학생들만이 치열한 시가전으로 맞서고 있었다.

증원된 1개 대대병력과 장갑차로 보강된 토벌군은 1948년 10월 23일 아침 좌익세력의 미미한 저항을 받았지만 이를 쉽게 격퇴하고, 오전 11시경에 순천 전역을 탈환하였다. 순천에서 퇴각한 봉기군의 주력부대는 광양을 거쳐 백운산과 지리산으로 입산하고, 일부는 벌교 방면으로 물러났다. 순천을 점령한 토벌군은 가담자와 협력자를 색출하기 위해 가옥을 하나하나 수색하였다. 지역 주민들을 북국민학교[현 순천북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이게 하여 몸서리쳐지는 민간인 협력자 색출이 시작되었다.

[결과]

1948년 10월 23일 토벌군과 경찰은 순천읍민들을 북국민학교에 모이게 했다. 이후 운동장이 비좁아 순천농림중학교[현 순천대학교]로 집결시킨 후 이른바 ‘부역자’를 색출하였다. 10대 후반에서 40대 남자들에게는 옷을 벗고 팬티만 입게 하였다. 경찰·대동청년단·학련생 등이 봉기군 가담자와 민간인 협력자 색출에 앞장섰고, 그다음 동네별 지방유지, 우익인사들이 이른바 손가락 총으로 색출하였다. ‘부역자’는 제1급[인민재판에 적극 참여자], 제2급[소극적 참여자], 제3급[애매한 자]로 분류되어 처벌 혹은 재심사를 받았다. 이 중 경찰은 악질적이라고 판단한 12명[박찬길 검사 포함]을 1948년 10월 23일 순천농림중학교 교정에서 총살하였다. 순천에서 벌어진 첫 번째 학살이다. 학살 광경은 『라이프지』 기자 칼 마이던스에 의해 생생하게 촬영되었다.

순천의 민간인 학살은 당시 호남계엄지구사령관이었던 김백일 중령에 의해 주도되었다. 군경에 의한 무법적인 학살에 대해 미 임시군사고문단의 하우스만 조차도 본국에 올린 보고에서 순천경찰이 “본격적으로 복수하러 나섰고, 수감포로와 민간인들을 처형하고 있다. … 여러 명의 친정부 민간인들이 이미 살해되었으며 시민들은 우리가 적만큼이나 나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라며 여론의 악화를 우려할 정도였다.

2008년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순천 지역 피해자를 439명으로 특정하였다. 이는 피해 신청자를 중심으로 피해자를 특정한 인원이며, 1948년 10월 말에서 1950년 2월까지 순천 지역 여순사건에서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 수는 약 2,000여 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밝혔다.

순천 지역 여순사건 화해와 평화를 위한 순천시민연대에서는 『여순사건 순천지역 피해실태 조사보고서』를 2006년에 발간하였다. 『여순사건 순천지역 피해실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순천 지역 피해자는 1,661명이며, 이 가운데 대한민국 군경에 의한 여순사건 희생자는 1,026명, 반군과 지방좌익에 의한 희생자는 635명이라고 밝혔다.

[영향]

이승만 정권은 여순항쟁을 계기로 정치적·이념적 갈등을 극단적으로 조장하면서 ‘공산주의자=반민족주의자=매국노’라는 등식과 아울러 ‘공산주의자=빨갱이=악마’로 적용하였다. 반면에 ‘반공주의자=민족주의자=애국자’라는 등식을 적용하여 아와 적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의 반공 프레임을 구축하였다. 이는 공산주의자[빨갱이]는 인륜을 저버린 비인간으로써 죽임을 당하여도 마땅한 존재, 언제라도 죽일 수 있는 존재로 일반화하였다. ‘빨갱이’는 여순항쟁을 시작으로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권력의 중심에 있다.

또한 국가권력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법적·제도적[「국가보안법」, 학도호국단, 「계엄법」 등] 장치를 정비하였다. 이는 국민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주요한 일상이 되도록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언론, 문화예술이 동원되어 계몽과 홍보란 ‘민심작흥운동’과 같은 문화적 방법론도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언론인, 문화예술인, 종교인 등 당대 지식인들은 전라남도 사람을 악마, 귀축[이리 같은 짐승], 빨갱이 등으로 간주하며 비인간성을 널리 알렸다. 즉 국민에게 여순항쟁의 적대 의식과 부정적 인식을 사회 전반에 내재시키면서 정권의 안정을 꾀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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