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 변화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600327
한자 行政變化
영어공식명칭 Administration Change
영어의미역 Administration Change
영어공식명칭 Administration Chang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순천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이욱

[정의]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순천 지역에 설치되었던 지방 행정 단위와 명칭의 변천

[개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순천 지역의 명칭이 다양하게 바뀌었다. 삽평군을 시작으로 승주목, 승주연해절도사, 승평군, 순천부, 순천도호부, 순천군이 그것이다. 이러한 명칭 변화가 나타난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명칭 변화는 단순히 이름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순천이 지닌 위상에 변화가 있음을 의미한다. 순천 지역 자체의 사회 경제적 변화가 순천의 읍격에 영향을 미친 측면이 있다. 아울러 중앙정부의 지방지배정책 변화에 따른 행정체제 개편의 영향을 받은 측면도 있다. 순천의 명호 변화를 통해 순천의 지역적 위상을 살피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화하지 않았던 것은 순천의 지역적, 정치적 위상 때문에 순천이 늘 중요하게 취급되었다는 점이다.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순천의 행정 명칭 변화]

순천 지역이 하나의 지방행정 단위로 나타난 것은 삼국시대가 거의 끝나갈 무렵으로, 백제의 감평군[무평군, 혹은 삽평군]이었다는 『삼국사기』의 기사이다. 순천 지역이 백제의 영토로 편입된 시기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백제 성왕 대에는 백제의 영토였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백제가 군을 설치한 것이 백제 성왕 때이기 때문이다. 백제 성왕 21년(544)~22년 사이 백제는 신라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임나(任那)의 하한(下韓)에 군령(郡令)과 성주를 설치하였다. 모두 37개 군현을 5방의 관할 하에 두었다. 그중 지금의 전라남도에 해당하는 지역을 관할하는 곳은 남방[지금의 광주광역시]이었다. 그리고 남방의 관하의 군 중 하나로 감평군(欿平郡)이 설치되었다. 나중에는 남방이 무진주로 개칭되었다.

삼국이 통일된 이후에도 감평군[삽평군]으로 유지되다가 757년(경덕왕 16)에 당의 제도를 따라 주·군·현간의 영속 관계를 강화하고 동시에 전국에 걸쳐 모든 지명을 중국식 한자명으로 고쳤다. 그에 따라 무주총관부의 관내에 들게 된 감평군은 승평군(昇平郡)으로 개칭되었다. 승평군은 승주군(昇州郡)으로도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순천은 군으로서 주변의 해읍현(海邑縣), 희양현(晞陽縣), 여산현(廬山縣)을 관할하였다. 해읍현은 백제 때 원촌현으로 지금의 전라남도 여수이고, 희양현은 백제 때 마로현으로 지금의 전라남도 광양이며, 여산현은 백제 때 돌산현으로 지금의 여수 돌산에 해당된다.

757년에 시행했던 지방 제도 개편은 무열왕 시기에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추진했던 중국화 정책이었고, 지방통치의 강화를 꾀한 것이다. 그러나 이 조치는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776년(혜공왕 12)에 정식으로 철회되었다. 그러나 순천에 사용했던 ‘승평군’이라는 명칭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까지도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순천의 행정 명칭 변화]

고려시대 순천의 행정구역은 변화를 거듭하였다. 후삼국의 분열을 극복하고 진정한 통일국가를 건설한 고려는 지방세력까지 통치체제로 포섭할 여력이 없었다. 태조부터 경종 대까지[936-981] 일부 군사적인 거점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지방세력의 자치상태에 있었다. 조세 수취를 맡은 금유, 조장, 전운사 등이 지방에 파견되어 업무를 처리하는 수준이었다. 지방의 일부나마 지방관이 파견된 것은 983년(성종 2)이었다. 이때에는 승주를 포함한 12주에 목이 설치되었다. 최초의 지방관이 파견된 지역에 순천이 포함되었다는 것은 순천의 위상이 그만큼 컸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995년(성종 14)에는 전국을 10도로 나누고, 12목이 설치되었던 큰 주를 중심으로 12절도사를 두었다. 그 밑에 7도단련사(都團練使)·11단련사·21방어사·15자사(刺史)를 설치하였다. 거란의 제1차 침입을 겪은 이후 지방호족세력의 통제 강화와 거란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한 국방력의 강화를 위해서였다.

12주에는 절도사를 장관으로 하는 12군(軍)이 설치되었다. 순천에는 12주의 하나인 승주(昇州)가, 승주에는 12군의 하나인 연해군(兗海軍)을 두었다. 승주-연해군과 나주-진해군은 10도 중 해양도(海陽道)에 속했고, 승주연해군의 관할에는 낙안, 곡성, 부유, 광양, 여수, 돌산 및 다수의 향·소·부곡을 관할하였다.

절도사 체제는 1005년(목종 8)에 절도사만 남고 양계(兩界) 지방을 제외한 지역에서 도단련사·단련사·자사 등이 없어짐으로써 아래서부터 붕괴되었다. 대신 점차적으로 지주부군(知州府郡)과 현령(縣令)으로 대치되다가 1012년(현종 3)에 12절도사마저 폐지됨으로써 완전히 해체되었고, 5도호(都護)와 75도안무사가 설치되었다. 이는 강조의 정변 등 왕위 계승을 둘러싼 혼란과 거란의 2차 침략으로 인한 왕조와 국가적 혼란을 극복하려는 조치였다. 이때 조치로 순천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1018년(현종 9)에 다시 새로운 제도가 시행되었고, 이는 고려 말까지 그 골격이 유지되었다. 전국을 경기[개경]와 호경[서경] 및 12계수관도로 나누었다. 12계수관은 4도호부와 8목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위상이 낮은 부[지부사], 주[방어사·지주사]·군[지군사]을 두는 방식이었다. 순천은 지주사가 파견되는 승주가 되었다. 983년(성종 2) 이래 12목으로 전라도에서는 나주와 동격이었던 순천은 한 단계 강등된 것이었다. 1036년(정종 2) 승주는 다시 한 단계 낮은 지군사가 배치되는 승평군으로 개칭·강격되었다. 관할 구역도 부유현, 광양현, 여수현, 돌산현 등은 관할에 있었지만, 곡성군과 낙안군 등은 나주목의 관할로 이관되었다.

이 시기 순천의 위상 축소는 순천 지역 호족 세력의 위상 저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려 건국 당시 순천을 대표하던 호족 세력이었던 박영규(朴英規)김총(金摠)은 통일 이후 중앙 정부로 진출하기보다 지방세력으로 잔존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그 입지가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순천박씨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박영규와 함께 몽골 침략기에 박난봉(朴蘭鳳)이 출현하는데, 박난봉순천박씨의 중시조로 여겨지는 것도 바로 그 때문으로 생각된다. 중앙이나 지역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약해졌던 순천박씨박난봉의 출현으로 위상을 회복했던 결과라고 보이기 때문이다.

위상이 약해졌던 순천이 일시적으로 승격된 시기가 있었다. 1309년(충렬왕 34) 승평군이 일약 승주목으로 개칭 승격되었다. 그러나 불과 2년 뒤인 1310년(충선왕 2)에는 다시 순천부로 개칭되었다. 그것은 1308년 왕위로 복위하게 된 충선왕의 개혁정치와 관련이 있었다. 충선왕은 즉위와 함께 수취체계를 바로잡고 국가재정의 충실을 기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전국적으로 은닉되어 수세에서 빠진 토지와 호구를 파악하는 데 필요한 형태로 행정체제를 개편하려고 하였다. 충선왕은 전국에 전민계점사(田民計點使)를 파견하여 인정과 호구가 많은 지역에 임시로 새로이 목을 설치하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의 호구와 토지를 조사하는 사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려 했다. 때문에 목으로 승격 조치는 임시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그리하여 이 사업이 거의 마무리된 1310년(충선왕 2)에 목으로 승격되었던 군현들의 관격을 원래대로 환원하는 조치를 시행했다. 임시적인 조치로 끝나긴 했지만, 이때의 조치로 ‘순천’이라는 이름이 역사에 처음 등장했고, 관호(官號)도 군에서 부로 승격되었다.

[조선시대 순천의 행정 명칭 변화]

조선의 지방통치제도는 태종 대에 확립되고 세조 대에 일부 수정되었다. 전체적으로는 고려시대의 것을 답습하였지만, 몇 가지 점에서 큰 변화가 있었다. 한국사 최초로 상급 지방통치조직인 도제가 확립되었다. 그리고 도 아래의 행정 조직으로 부윤이 있는 부, 목사가 있는 부, 대도호부, 도호부, 군, 현으로 지방 조직을 정리하였다.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던 속현도 없어지고, 모든 군현에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고려 말 순천부였던 순천은 1413년(태종 13) 순천도호부가 되었다. 전라도에서는 전주부가 가장 위상이 높았다. 전주의 지방관은 부윤으로 관찰사와 품계가 같은 종2품의 관리가 파견되었다. 다음은 광주목과 나주목이었고, 남원은 대도호부가 되었다. 이들 네 곳에는 지방관과 함께 판관이라고 불리던 요즘의 부시장도 파견되었다. 이 네 도시 다음의 위상이 도호부였고 순천이 여기에 해당한다. 현재 전라남도 동부 6군을 관할하는 위상을 갖고 있었고, 지금까지도 그 위상에는 변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내내 순천의 읍격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다만 역적의 고향 등의 이유로 일시적으로 강등되는 시기도 있었다. 순천에서도 몇 차례 그런 사례가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1630년(인조 8), 1631년(인조 9), 1663년(현종 4), 1669년(현종 10), 1733년(영조 9), 1786년(정조 10) 등 모두 6차례에 걸쳐 순천의 지방관이 현감으로 나오고 있다. 도호부가 현으로 강등되면 10년 동안 그 위상이 유지된다. 때문에 위 6차례 기사 중 10년이라는 기간을 감안하면 모두 네 차례 현으로 강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강등 사유는 1786년 기사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역적 이태수(李泰守)의 출생지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10년 뒤 다시 순천은 도호부의 지위를 되찾았다. 그리고 1895년 지방통치제도 개편 때 순천도호부는 순천군으로 개칭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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