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600333
한자 東學農民革命
영어공식명칭 Donghak Peasant Revolution
영어의미역 Donghak Peasant Revolution
영어공식명칭 Donghak Peasant Revoluti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순천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인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전개 시기/일시 1894년 8월연표보기 - 동학농민혁명 영호도회소 무력 투쟁 전개
발생|시작 시기/일시 1894년 9월 - 동학농민혁명 영호도회소 설치
성격 반제반봉건운동
관련 인물/단체 김인배|유하덕|정우형|권병택|정우형|김학식|김영구|김영우|남정일|정재철/영호도회소

[정의]

1894년 전라남도 순천 지역 동학농민혁명군이 전개한 반제반봉건 운동

[개설]

1893년 5월 보은집회에 동학교도와 농민이 모였는데, 순천의 동학교도 50여 명도 참석했다. 순천의 동학교도는 백산봉기에도 참가했고, 1894년 6월 하순 순창을 거쳐 순천으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순천 지역의 동학농민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순천 지역은 영호도회소를 중심으로 전라남도 동부 지역 동학농민운동의 중심적 공간 역할을 했다.

[역사적 배경]

1894년 9월 2차 기병한 동학농민혁명군이 북으로 진격하는 동안 광주, 나주, 담양, 무안 등지의 후방 방어가 중요했다. 당시 동학농민혁명군에서는 손화중(孫華仲)과 최경선(崔景善)이 남부를, 김개남(金開南)이 남원을 담당했다. 그리고 김인배(金仁培)는 김개남의 명령으로 순천으로 와서 영호도회소를 설치했다. 영호도회소는 전라남도 지역 동학농민군의 구심점으로서 전라남도 지역의 통치권을 장악한 상태로 폐정개혁 활동을 주도했다. 동시에 전주도회소나 남원도회소로부터 지시 사항을 각 군·현의 농민군에게 전달했다. 영호도회소에서는 영호대접주 김인배, 영호수접주 유하덕(劉夏德), 영호도집간 정우형, 성찰 권병택, 도집강 정우형, 광양과 순천 수접주 김학식, 서면 접주 김영구, 별량면 접주 김영우, 월등면 접주 남정일, 율촌면 접주 정재철 등이었다.

[경과]

동학농민혁명군이 봉기한 이후 1894년 6월 순천부사 김갑규는 민영준의 매부로 각종 부정을 저질렀고, 마지막에는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이임했다. 김갑규가 이임한 이후 2~3개월 동안 순천에는 새로운 부사가 부임하지 않았다. 이런 순천의 행정, 군사적 공백기에 영호도회소가 설치되었다.

그 중심적인 역할을 대접주 김인배가 담당했다. 김인배를 비롯한 영호도회소의 동학농민혁명군은 순천 관아에 진을 치고 행정을 장악했다. 순천은 영호도회소가 설치된 이후 약 6개월 동안 조선 정부 조직이 아닌 또 다른 권력, 즉 동학에 의한 대체 권력이 존재했다. 이들은 순천, 광양의 행정을 접수하고, 낙안·보성 등지의 관리들을 통제하기도 했다. 이 영호도회소는 이후 경상남도로도 진출했다.

1894년 7월 22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하여 왕과 왕비를 감금하고 친일 정부를 세우게 하자 동학농민혁명군 수뇌부는 1894년 8월 25일 남원에서 농민군 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척왜를 표방하며, 제2차 봉기를 결정했다. 이에 따라 순천 지역은 1894년 8월 말부터 새로운 활동에 들어갔다. 지금까지 동학의 포교, 치안 유지, 폐정 개혁 등에 중점을 두었던 것과 달리 본격적인 무력 투쟁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특히 1894년 9월 1일 김인배의 영호도회소의 주력군이 경상남도 지역으로 진출한 때에도 순천에는 상당한 규모의 동학농민혁명군이 포진했다. 당시 이들은 후방 방위와 치안유지, 폐정개혁을 지속적으로 수행했다. 그리고 군수품의 확보를 담당했다. 영호도회소가 설치된 이후 순천은 동학농민혁명군의 본거지였다. 그러나 여수좌수영 전투 이후 영호도회소의 동학농민혁명군은 세력이 약화되었다. 1894년 12월 6일 동학농민혁명군에 가담했던 순천 성내의 아전들과 주민들은 상황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영호도회소가 기습 공격을 당하고 여수, 광양 등지의 동학농민혁명군이 체포, 처형당하게 된 것이다. 순천에 들어온 좌수영군은 동학농민혁명군을 가혹하게 죽였다. 도집강 정우형은 6일 총살되었고, 권병택, 김영구, 김영우, 남정일 등은 총살되거나 효수되었다. 그리고 94명의 이름 모를 동학농민혁명군이 죽었다. 총 150여 명이 죽었다. 순천의 영호도회소는 기능이 상실되었다. 동학농민혁명군이 패전하면서 광양을 점령한 일본군과 좌수영군은 1894년 12월 12일 순천으로 들어와 동학농민혁명군을 수색했다. 그러나 이미 성내는 민병과 좌수영군에 의해 처참하게 된 상태였다. 400여 구의 시체가 성안에 버려져 있었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군은 장흥과 흥양으로 퇴각했다. 결국, 순천은 조선 정부에 의해 다시 관장되게 되었다.

한편 또 다른 순천의 공간으로 낙안읍성이 존재했다. 1894년 9월 1일 김인배의 영호도회소의 주력군이 경상남도 지역으로 진출한 때 일부의 동학농민혁명군은 이곳 낙안읍성을 공략했다. 김인배가 하동으로 진출한 이후 순천에 남은 동학농민혁명군은 양하일의 지도로 약 1천여 명이 낙안전투를 준비했다. 이것은 군수품 확보가 주목적이었는데, 이들은 1894년 9월 15일 선암사에 집결했다. 그리고 오금재를 넘어 낙안읍성을 공략하여 성을 장악했다. 당시에는 민가 149호가 불에 탔는데, 동학농민혁명군이 낙안읍성 안에서 4일간 머물면서 군기고를 탈취하여 무기를 확보하고, 아울러 각종 군수품을 마련했다. 당시 낙안읍성에서는 결당 쌀 7말, 호당 말먹이 콩 1되씩이 부과되었다. 이밖에도 장태, 동아줄, 화약, 상차 등을 만드는 데 쓰일 물품으로 푸른 대나무, 짚신, 껍질 벗긴 삼 줄기, 볏짚, 목판 등이 할당되었다. 영호도회소의 동학농민혁명군은 선암사를 거쳐 다시 순천으로 되돌아갔다. 이후 영호도회소의 동학농민혁명군은 순천 주변의 지역에서 행정, 군사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후방의 군사적 요충지로서 역할을 해냈다. 시기적으로는 1894년 12월까지 그 역할을 담당했다.

[결과]

순천의 영호도회소는 좌수영 공격 실패 이후 급격하게 쇠퇴했다. 이후 순천에서는 영호도회소의 농민군 지도자와 농민군이 살육되었다. 이처럼 순천에서 강력한 운동이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지역 농민들이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아보려는 의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의의와 평가]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고 관리들의 탐학(貪虐)이 계속되자, 농민은 영호도회소를 중심으로 순천에서 동학농민혁명군이 되었다. 동학농민혁명군은 일본의 배척,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내걸었다. 이들이 순천 지역에서 일으킨 반봉건 반외세운동은 좌절되었지만, 이들의 의식은 이후 순천 지역 반일운동과 저항정신의 뿌리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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