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600334
한자 韓末義兵抗爭
영어공식명칭 Righteous Army(uibyong) Resistance Movement in Modern Korean History
영어의미역 Righteous Army(uibyong) Resistance Movement in Modern Korean History
영어공식명칭 Righteous Army(uibyong) Resistance Movement in Modern Korean History
이칭/별칭 한말의병전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순천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홍영기

[정의]

1906년부터 1910년 경술국치 이전 시기까지 전라남도 순천에서 전개된 항일투쟁.

[개설]

한말 의병은 1894년 이후 약 20년 동안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고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활동했다. 처음에는 1895년 10월 일본이 자행한 명성황후시해사건(明成皇后弑害事件)에 반대하여 복수토적(復讎討賊)을 표방한 의병이 일어났다. 그 후 일본의 강요에 의해 체결된 1904년의 한일의정서(韓日議政書), 1905년의 을사늑약(乙巳勒約) 등과 같은 일본 제국주의의 정치적 침탈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했다. 1907년에 이르러 일제는 고종(高宗)을 강제로 퇴위(退位)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의 강제 체결, 군대해산 등을 통해 대한제국의 국권을 유린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저지하고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항일의병을 일으켰다.

[한말 호남의 의병 활동]

대한제국 시기 전라도에서는 가장 강력한 항일투쟁이 전개되었다. 이에 대해 박은식(朴殷植)은 1920년에 간행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대개 각도의 의병을 말하건대 전라도가 가장 많았다.”라고 서술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현재 구체적인 수치로 확인할 수 있다. 즉, 전라도 의병은 1908년에는 일본 군경과 교전회수(交戰回數)와 교전의병수(交戰義兵數)에서 각각 25%와 24.7%를, 1909년에는 각각 46.6%와 59.9%를 차지하고 있다. 1909년 9~10월 일제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南韓暴徒大討伐作戰)’을 실시함으로써 당시 전라도 의병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그런데도 순천 지역 의병 활동은 1910년대뿐만 아니라 1921년까지 확인되고 있다.

전라도의 한말 의병은 1896년 봄 장성과 나주에서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순천에서는 의병의 움직임을 찾을 수 없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의병이 재차 일어났다. 전라도에서는 1906년 6월 최익현(崔益鉉)과 임병찬(林炳瓚)이 의병항쟁을 주도하였다. 최익현과 임병찬은 전라북도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켜 정읍, 곡성, 순창 등지를 무대로 약 열흘 동안 활동하다가 역부족으로 해산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의병항쟁을 계기로 전라도의 의병봉기가 본격화되었다.

당시 광양 백운산(白雲山)에 은거 중이던 백낙구(白樂九)는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하기 위해 전라남도 동부 지역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1906년 10월경 백낙구는 백운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광양(光陽) 관아를 점령해 무기와 군자금을 확보하였다. 이어 순천을 공격하여 일본인들을 쫓아낼 계획이었으나 실패한 후 구례(求禮)로 이동하였다. 하지만 백낙구는 구례에서 동지 5명과 함께 체포된 후 완도군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1907년 12월 백낙구는 순종(純宗)의 특사(特赦)로 풀려났으나 다시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순국하였다. 백낙구의 부하 중에 안치명(安致命)과 김봉구(金奉九)는 순천에서 탈옥하여 화를 면한 바 있다. 이처럼 1907년 말까지 순천에서 일어난 본격적인 의병항쟁은 찾아보기 어렵다.

[순천의 의병 활동]

1908년 초에 이르러 순천의 의병 활동은 조계산(曹溪山)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일본 경찰은 “송광사(松廣寺)선암사(仙巖寺)가 자리한 조계산에는 의병의 출몰이 잦으며, 지형적인 조건에 의하여 의병을 진압하기 어렵다.”라고 파악하였다. 이때부터 의병들이 조계산을 의병의 근거지로 이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계산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의병장으로는 보성 출신의 안규홍(安圭洪), 순천 출신의 조규하(趙圭夏)[1877?~1908]와 강진원(姜振遠)[일명 강형오(姜炯吾), 1881~1921] 등을 들 수 있다. 안규홍 의병장은 처음에 동지들과 함께 순천에서 활동 중인 강원도 출신의 해산군인으로 추정되는 강용언(姜龍彦)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강용언은 조계산 정상 부근의 향로암(香爐菴)을 주요 근거지로 활용하였다. 이들은 지형적으로 유리한 곳에 있는 사찰을 의병의 근거지로 이용한 것이다. 그리고 조규하강진원은 모두 순천 출신인데, 이들은 조계산을 무대로 의병을 일으켰다. 이처럼 순천에서 활동하는 의병들은 의병 활동에 유리한 지형적 조건을 갖춘 조계산을 근거지로 활용했다.

[순천의 의병부대와 주요 활동]

조규하 의병장은 현 순천시 송광면 대곡리 출신으로 순천에 대대로 거주하는 옥천조씨를 기반으로 삼아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강진원 의병장은 서면 당천리[현 순천시 서면 운평리 당천마을] 출신으로, 의병을 일으킨 후 조규하 의병부대와 함께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 말미암아 일제는 이들을 주장(主將)과 부장(副將)의 관계로 파악하였다. 또한, 이들은 곡성 출신의 노임수(盧琳壽)[일명 노인선(盧仁先)] 및 신정백(申正栢)[일명 신정우(申正雨)]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일제 군경과 맞서 싸웠다. 이처럼 순천의 의병항쟁을 주도한 의병장은 순천 출신으로, 순천 인근 지역인 보성과 곡성 출신의 의병장들과 서로 밀접하게 협력하면서 의병항쟁을 펼쳤다.

한편, 1908년 9월 조규하 의병부대는 곡성의 선주산(仙住山)에서 일본 군경과 싸웠는데, 이때 조규하 의병장을 포함한 의병 20여 명이 전사하였다. 조규하를 이어 강진원 의병장이 순천의 의병항쟁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강진원 역시 1909년 음력 6월 순천의 서면에서 일본 군경의 기습을 받아 부상을 당했으며, 경상남도 통영(統營) 앞바다의 연내도(蓮內島)[현재 경상남도 통영시 연화도로 추정]으로 피신해 위기를 모면하였다. 강진원은 1910년 8월 경술국치 전후 시기에 의병 활동을 재개한 것으로 추정된다. 『매일신보』[1913년 4월 8일]에 의하면, 강진원을 비롯한 의병들이 1912년 이후 군자금을 조달하는 활동을 벌였다고 한다. 이 시기에 강진원은 외가인 순천의 쌍암면 두월리[현 순천시 승주읍 두월리] 신기마을에 있는 오성산(五聖山)에 은신하며 활동했다. 강진원은 그곳에서 제자들을 양성하는 한편, 비밀리에 항일활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의 집요한 추적을 받아 1921년 8월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요컨대, 강진원 의병장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2년 후까지 항일투쟁을 벌이다가 체포된 마지막 의병장이라 하겠다.

순천에서 활동한 의병들은 일본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일본의 수비대, 헌병대, 순사대 등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간혹 이들은 임지로 부임하는 순사나 체포된 의병을 호송하는 경찰들을 공격하는 등 대담한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때로는 일본이 설치한 통신시설을 파괴했으며, 순천을 비롯한 전라도로 들어오는 일본 농·어민의 이주를 방해함으로써 일본의 식민정책을 저지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이들은 일진회(一進會)를 비롯한 친일파 처단 활동을 벌였다. 세금을 거두는 세무관리, 공전영수원, 우편체송인 등을 공격함으로써 주민 보호와 납세거부투쟁을 선도하였다. 이러한 항일투쟁들이 주민들의 호응을 받았기 때문에 장기항전이 가능했을 것이다.

[일본군의 토벌 작전과 독립군 전환]

순천을 비롯한 전라남도의 의병 활동이 거세어질수록 일제의 군사적 대응도 강화되었다. 일제는 1909년 9월부터 두 달 동안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라는 대규모 군사작전을 시행했다. 수천 명의 전라남도 의병들이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자 당시 일제는 잔혹한 진압 작전을 펼친 것이다. ‘남한폭도대토벌작전’으로 말미암아 순천 출신으로는 조태식(趙泰植), 염필갑(廉必甲) 등이 체포되었고, 오용기(吳龍基) 등 수십 명이 자수하면서 큰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1910년 병탄 이후에도 순천 낙안(樂安) 출신의 김종주(金鍾冑) 등 우국지사들이 전 낙안군수 임병찬이 주도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에 가담하여 비밀결사운동을 주도했다. 그뿐만 아니라 순천 쌍암 출신의 강몽굴(姜夢屈) 등은 강진원 의병장 등과 함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했다. 순천 출신의 의병들이 1910년 이후에도 일제에 저항하며 독립을 위한 불굴의 투쟁을 계속한 것이다. 요컨대, 순천의 한말의병항쟁은 1910년대 비밀결사운동으로 계승됨으로써 의병에서 독립군으로 전환되어 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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