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600605
한자 趙瑜
영어공식명칭 Jo Yu
영어음역 Jo Yu
영어공식명칭 Jo Yu
이칭/별칭 유옥(兪玉),건곡(虔谷)
분야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남도 순천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46년연표보기 - 조유 출생
몰년 시기/일시 1428년연표보기 - 조유 사망
거주|이주지 조유 이주지 - 전라남도 순천시
묘소|단소 조유 묘소 -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면 주암리 지도보기 을좌
사당|배향지 겸천서원 -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면 죽림리 401 지도보기
성격 문관
성별
본관 순창
대표 관직 지군사

[정의]

조선 전기 순천 지역에서 세거하던 옥천조씨의 순천 입향조이자 문관.

[가계]

조유(趙瑜)[1346~1428]의 본관은 순창(淳昌)이며, 자는 유옥(兪玉)이고, 호는 건곡(虔谷)이다. 조유의 아버지는 옥천부원군으로 알려진 조원길(趙元吉)이다.

[활동 사항]

조유는 고려 말 과거에 급제하여 중현대부(中顯大夫) 전농시부정(典農寺副正)까지 올랐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고려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키기 위해서 두문동(杜門洞)[새 조정인 조선에 반대하여 벼슬살이를 거부한 고려의 유신들이 은거하였던 마을,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의 서쪽 골짜기로 전해짐] 72현(賢)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이후 순창 지역으로 낙향하였다. 이후 1408년(태조 8) 지군사(知郡事)로서 전라도 영광 지역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여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나이가 들어 순창 지역에서 순천(順天) 부유현(富有縣) 겸천(謙川)으로 옮겼다. 1428년(세종 10)에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조유는 부모님의 상을 훌륭하게 잘 치러 후대에 선례를 남겼다. 당시 고려의 풍속이 부모의 상(喪)을 당하면 모두 백 일 만에 탈상(脫喪)하였으나, 조유는 천성이 효성스러워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 야은(冶隱) 길재(吉再)[1353~1419]와 더불어 삼년상을 치르니 당시 사람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아버지와 어머니 상을 당하여서 몸소 흙을 져다가 봉분(封墳)을 짓고 6년 동안 시묘살이(侍墓)를 한 사실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대동야승(大東野乘)』 등의 문헌에 전한다.

[묘소]

조유의 묘는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면 주암리 을좌(乙坐)에 있는데, 진선(進善) 김원행(金元行)이 비문을 짓고, 교리 조영순(趙榮順)이 글씨를 썼다.

[상훈과 추모]

조유의 부음(訃音)이 1428년 조정에 알려지자 세종이 사신을 보내 1품 관리의 예로 장사 지내게 하고 묘소를 지키는 집 3호(戶)를 내렸다. 그리고 ‘효자 전부정 조유의 정려’라는 정려(旌閭)를 내리고, 어제시(御製詩)를 내리니 지금까지도 집안에 전하여 오고 있다. 정려는 본래 순창 건곡(乾谷)에 있었는데, 1661년(현종 2)에 부유현(富有縣)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면 죽림리 겸천(謙川) 위로 옮겨 세웠다. 1455년(세조 1) 12월 현령으로서 좌익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나, 아들 조숭문(趙崇文)[?~1456]과 손자 조철산(趙哲山)[?~1456]이 사육신과 함께 화를 당하자 고신(告身)이 추탈되기도 하였다. 1720년(숙종 46)에 고을의 선비들이 겸천사(謙川祠)를 지어 아들 조숭문, 손자 조철산과 함께 제향 되었다. 1868년(고종 5)에 서원이 철폐된 이후에는 단(壇)을 설치하여 제사를 모시다가 1895년에 겸천서원(謙川書院)으로 중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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