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윤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600653
한자 吳允七
영어공식명칭 O Yun-chil
영어음역 O Yun-chil
영어공식명칭 O Yun-chil
이칭/별칭 윤원(允原),석강(石崗),오충섭(吳充燮)
분야 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남도 순천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홍영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8년연표보기 - 오윤칠 출생
몰년 시기/일시 1909년연표보기 - 오윤칠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2년연표보기 - 오윤칠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출생지 오윤친 출생지 - 전라남도 순천시
거주|이주지 오윤칠 거주지 -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지도보기
활동지 오윤칠 활동지 - 전라남도 동부 지역
성격 의병
성별
본관 해주(海州)

[정의]

일제강점기 순천 출신으로 안규홍 의병부대에서 활동한 의병.

[가계]

오윤칠(吳允七)[1878~1909]은 전라남도 순천군 송광면(松光面) 신평(新坪)[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에 거주하였다. 오윤칠의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윤원(允原), 호는 석강(石崗), 이명은 충섭(充燮)이다.

[활동 사항]

을사늑약을 비롯한 일제의 침략이 자행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이 무렵 순천 지역에서도 의병이 일어났으나,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1907년 후반에 이르러 일제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국가의 상징인 군대마저 해산시키자 온 국민들의 항일의식이 크게 높아졌다. 그리하여 1908년에 이르러 수많은 의병부대들이 조직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순천 지역의 경우에도 전 임실군수였던 조규하(趙圭夏)[1877~1908] 의병장이 의병을 조직하여 순천 지역을 중심으로 반일투쟁을 전개했다.

순천 지역의 인근인 보성 지역의 머슴 출신인 안규홍(安圭洪)[1879~1910]은 순천 지역의 조계산을 근거지로 삼아 의병 활동을 벌였다. 이를 계기로 오윤칠은 안규홍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척후(斥候)[군사상의 필요에 의하여 적진의 형편을 살핌]로 활동하며 약 2년 동안 수많은 전투에 참여하였다. 1908년 4월 전라남도 보성군 조성면(鳥城面) 파청(巴靑)에서 일본 헌병 2명을 죽이고 1명에게 중상을 입히는 최초의 성과를 거두었다. 8월에도 보성군 문덕면(文德面) 진산(眞山)전투에서 일본군 4명에게 중상을 입히는 등의 전과를 거두었다. 그뿐만 아니라 오윤칠이 가담한 안규홍 의병부대는 친일파 세력인 일진회원의 처단, 세금거부투쟁, 탐학한 관리의 징치 등의 활동을 벌임으로써 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안규홍 의병부대는 순천, 고흥, 광양, 보성, 장흥 등 전라남도 동부 지역에서 눈부신 활동을 펼쳤다. 전라도의 경우 강력한 의병 활동으로 인해 무정부 상태에 빠지자, 일본은 1909년 9월부터 두 달 동안 대규모 군대를 투입하여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자행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500명 이상의 의병들이 전사했으며 2000명 이상의 의병들이 붙잡히거나 투항하였다. 안규홍 의병부대 역시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윤칠 역시 해산 후 고향에 돌아왔으나 일본 군경의 무자비한 탄압을 피해 전라남도 함평군(咸平郡)으로 피신했던 것 같다. 결국, 1909년 9월 12일 함평군 대화면(大化面)[현 전라남도 장성군 동화면] 이교리(利橋里) 홍정(洪亭)에서 체포된 후 불법 총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상훈과 추모]

오윤칠은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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