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06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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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郭宇盈 |
영어공식명칭 | Kwak U-yeong |
영어음역 | Kwak U-yeong |
영어공식명칭 | Kwak U-yeong |
이칭/별칭 | 곽우영(郭宇英) |
분야 | 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재성 |
[정의]
일제강점기 순천 출신으로 3.1운동을 주도한 개신교 목사이자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곽우영(郭宇盈)[1874~1931]은 1919년 3.1운동 당시 목포부 기독교계에서 활동하면서 시위를 계획했다. 곽우영(郭宇盈)과 함께 시위 계획에 참여한 사람들은 서상봉(徐相鳳)[1869~1920]·서화일(徐化一)·박여성(朴汝成)[1860~1908]·박복영(朴福永)[1890~1973]·강석봉(姜錫奉)[1898~1966]·양병진(楊炳震) 등 목포부의 기독교계 인사들, 그리고 남궁혁(南宮赫)·오도근(吳道根)·김영주(金永周)·박상렬(朴相烈)[1897~1987]·권영례(權寧禮)·오재복(吳在福)·이금득(李今得) 등이었다. 시위 계획은 태극기를 제작하고 “동포의 봉기에 목포인들도 적극 호응하자.”라는 취지의 경고문을 작성하며, 시위 날짜를 1919년 4월 8일로 정하고 시민과 학생 동원 방법을 논의하는 것 등이었다. 곽우영은 기독교계 인사들과 함께 영흥학교와 정명 여학교 학생 동원을 담당했다.
시위 준비를 마친 곽우영은 1919년 4월 8일 시위에 참여했다. 이날 목포부 시위는 오전 10시 무렵부터 시내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다. ‘대한 독립 만세’라고 쓴 대형 깃발을 앞세운 시민과 학생들은 일제히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일본 헌병과 경찰은 즉시 출동하여 해산을 종용했다. 그러나 군중의 만세시위를 진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만세시위가 오후까지 계속되자 일본 헌병과 경찰은 기마부대와 군대까지 동원하여 무력진압에 나섰다. 일제의 무력진압으로 곽우영은 남궁혁·박상오·박상술·배치문·서화일 등 8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에 목포시민들은 이튿날에도 붙잡힌 이들의 석방을 위해 계속 석방시위를 하였다.
곽우영은 체포된 후 징역(懲役) 1년을 선고받고 목포 분감(分監)에 복역하다가 1920년 4월 29일 일제의 ‘정치범 특사’ 조치에 따라 석방되었다.
[저술 및 작품]
곽우영은 1923년 4월 13일 밤에 여수청년회관에서 열린 여수청년회 월례강연회에서 ‘인지위인’이란 제목으로 강연했다. 또 1924년 10월 보성군 벌교 예수교 예배당에서 개최한 전도강연회에 연사로서 참여했는데, 이때 직위는 목사였다.
[상훈과 추모]
곽우영은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