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06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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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贊臥 |
영어공식명칭 | Kim Chan-wa |
영어음역 | Kim Chan-wa |
영어공식명칭 | Kim Chan-wa |
분야 | 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홍영기 |
출생 시기/일시 | 1872년 - 김찬와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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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08년 12월 25일 - 김찬와 사망 |
거주|이주지 | 무학마을 -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부대장 |
[정의]
개항기 순천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활동 사항]
김찬와(金贊臥)[1872~1908]는 전라도 순천군 쌍암면 무학리(舞鶴里)[현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 무학마을]에 거주하였다. 김찬와는 1905년 말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일본의 행위에 격분하였다. 1908년 후반 순천 지역을 중심으로 군자금을 징발하는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같은 쌍암면 선학리(仙鶴里)에 사는 김찬명(金贊明), 쌍암면 칠성리(七星里)에 사는 김명숙(金明叔), 쌍암면 죽림리(竹林里)에 사는 김윤화(金允化), 쌍암면 신창리(新蒼里)에 사는 강몽구리(姜夢九伊)[일명 강몽굴(姜夢屈)] 등과 의병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김찬와를 비롯한 이들이 소속된 의진(義陣)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강몽굴은 일제의 강점 이후에도 순천 출신의 의병장 강진원(姜振遠)[일명 강형오(姜炯吾), 1881~1921]과 밀접하게 연계하여 활동한 점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항일활동을 함께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찬와를 비롯한 의병들은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이던 중 겨울의 추위를 피할 목적으로 1908년 12월 각자의 자택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 정보를 파악한 순천경찰서는 1908년 12월 24일 이들을 체포하기 위해 일인 순사 2명, 한인 순사 5명, 수비대 3명을 출동시켜 체포 작전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김찬명, 김명숙, 강몽굴은 재빨리 피신하여 위기를 모면했으나, 김윤화는 체포되고 말았다. 1908년 12월 25일 오전 7시 자택을 벗어나 피신하던 중 김찬와는 추격하는 일본 군경의 총에 맞아 순국하였다. 일본 군경은 김찬와가 부대장(副大將)으로 활동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상훈과 추모]
김찬와는 201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