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11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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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惠山-王武- 誕生- |
영어공식명칭 | A Story about a birth of Mont Hesan and Wangmu |
영어음역 | A Story about a birth of Mont Hesan and Wangmu |
영어공식명칭 | A Story about a birth of Mont Hesan and Wangmu |
이칭/별칭 | 혜산스님과 낙안오씨 이야기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종오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3년 - 「혜산스님과 왕무의 탄생이야기」 『터』하에 「혜산스님과 낙안오씨 이야기」로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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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1년 - 「혜산스님과 왕무의 탄생이야기」 『낙안과 낙안읍성』에 「혜산스님과 왕무의 탄생 이야기」로 수록 |
채록지 | 「혜산스님과 왕무의 탄생이야기」 -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
성격 | 풍수담|인물탄생담 |
주요 등장 인물 | 승려 혜산|태조 왕건|낙안오씨 처자|왕무[혜종] |
모티프 유형 | 명당 발복 |
[정의]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옛 낙안읍)에서 명당(明堂)에 묘를 쓴 후 왕비가 된 장화왕후에 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채록/수집 상황]
「혜산스님과 왕무의 탄생 이야기」는 2001년 순천대학교박물관과 순천시에서 편찬한 『낙안과 낙안읍성』에 「혜산(惠山)스님과 왕무(士武)의 탄생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말미에 손석우가 1993년 쓴 『터』 하에 수록된 「혜산스님과 낙안오씨 이야기」를 참조로 한 것이라고 출처를 밝히고 있다.
[내용]
도선국사의 제자 중에 승려 혜산(惠山)이 있었다. 전국을 순회하며 탁발(托鉢)을 하다가 낙안에 이르러 허기를 참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오씨(吳氏) 노인이 혜산을 발견하여 정성으로 간호하여 주었다. 쾌차한 혜산은 자신을 돌보아준 보답으로 자손 중에 왕비가 태어날 명당 터를 잡아 주었고, 오씨는 이곳에 선조 묘를 쓰고 나주로 이사를 하였다. 오씨 노인의 딸이 완사천(浣紗泉)에서 용이 자신의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꾼 후 빨래를 하러 갔다가 갈증이 난 왕건을 만나게 되고, 버들잎을 띄운 물바가지로 왕건의 마음을 사게 된다. 그날 밤 다시 집으로 찾아온 왕건에게 청혼서(請婚書)를 받고 간단한 혼례를 치른 후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데, 훗날 아이가 태어나거든 이름을 ‘무(武)’라고 지으라고 하면서 예장 뒷장에 이름을 써주고 떠났다.
시간이 흘러 자기 아들 무[훗날 고려 혜종, 912~945]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오씨 처자는 예장을 주면서 아버지를 찾아가게 한다. 송악[지금 황해도 개성시 일대]에서 대감 집 심부름꾼을 하던 무는 그 집 대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한다. 개국공신이었던 대감은 왕건에게 무의 이야기를 전하고 왕건은 무를 왕자로 받아들인다. 왕자가 된 무는 예장을 근거로 어머니를 왕후로 봉하도록 청했고, 오씨 처자는 마침내 장화왕후(莊和王后)에 봉해졌다.
이 일이 가능했던 것은 모두 혜산이 예언한 명당의 발복(發福)이 이루어진 것 때문으로 그 후로 오씨 성을 가진 이 가문을 ‘낙안오씨’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한, 낙안에는 지금도 옥녀산발형(玉女散髮形)의 지형이 있는데, 예쁘게 단장한 여인이 장군에게 투구와 떡을 올리는 모습을 형상하고 있는 곳으로, 장화왕후와 관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지금도 주민들 사이에 전해오고 있다.
[모티프 분석]
「혜산스님과 왕무의 탄생이야기」의 주요 모티프는 ‘명당 발복(明堂發福)’이다. 혜산이 잡아 준 명당에 묘를 쓴 오씨 집안이 발복되어 왕[고려 혜종]과 왕후[장화왕후]가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잘 알려진 왕건, 왕무(武), 오씨 처자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고려 태조 왕건과 오씨 집안이 연결된 배경에 혜산이 잡아 준 명당자리가 있고, 이곳에 선조의 묘를 씀으로써 발복이 이루어진 것이라는 일종의 풍수발복담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