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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601301
한자 順天敎育-先驅者-民族運動家友石金鍾翊
영어공식명칭 Pioneer and Nationalist of Suncheon Education, Useok Kim Jong-ik
영어음역 Pioneer and Nationalist of Suncheon Education, Useok Kim Jong-ik
영어공식명칭 Pioneer and Nationalist of Suncheon Education, Useok Kim Jong-ik
분야 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남도 순천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홍영기

[정의]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순천 출신의 지주이자 기업가로서 육영사업 및 사회 공익사업에 공헌한 인물.

[개설]

김종익전라남도 순천시(順天市) 월등면(月燈面) 대평리(大坪里)에서 김학모(金學模)와 양주아씨(楊州阿氏) 숙경(淑卿)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선 말 김종익은 유학을 배운 후 신학(新學)을 공부한 다음 1910년대에 일본에 유학하여 법학을 전공했다. 귀국 후 부친의 관계(官界) 진출 권유를 뿌리치고 경제계로 진출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1925년 부친의 사후(死後) 상속받은 전답을 기반 삼아 대평농장(大坪農場)을 설립하였다. 1930년대 초반 조선제사주식회사(朝鮮製絲株式會社) 등을 인수하여 경영하는 한편, 주식 투자를 통해 전라도 부호의 반열에 올랐다. 막대한 재산을 모은 김종익은 전남육영회(全南育英會)와 순천공립농업학교(順天公立農業學校)의 설립 등 사회 공익사업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1937년 5월 임종을 앞둔 김종익은 평생 모은 재산 175만 원을 사회사업에 써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운명하였다. 김종익의 유언에 의거하여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京城女子醫學專門學校)를 비롯한 순천고등보통학교(順天高等普通學校)와 순천여자고등보통학교(順天女子高等普通學校) 등이 잇따라 설립됨으로써 우리나라 여의사(女醫師)의 양성 및 순천의 근대교육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가계와 성장과정]

김종익(金鍾翊)[1886~1937]은 순천 출신으로 사천현감(泗川縣監)과 의흥군수(義興郡守)를 지낸 김학모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김종익의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명직(明直)·경백(景伯), 호는 우석(友石)이었다. 김종익의 집안은 지금의 순천 지역을 비롯한 전라남도 고흥군, 여수시 등지에서 세거해온 무반 신분이었다.

김종익은 어려서부터 순천의 선암사(仙巖寺)에서 과거시험에 대비하여 유학을 공부했다. 1894년의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었지만, 그 후에도 10여 년간 한학을 공부했는데, 서예의 해서와 초서에 능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06년에 제릉참봉(齊陵參奉)과 주전원(主殿院) 주사(主事)에 임명된 김종익은 아마도 부친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그 뒤 1909년에 서울의 중동학교(中東學校)에 입학하여 2년 후에 졸업하였다. 이어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YMCA]에서 상과(商科)를 수학한 후 1913년에 일본에 건너가 도쿄[東京]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일본어과(日本語科)를 수료하였다. 이듬해인 1914년 김종익은 일본의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부(專門部) 법과(法科)에 입학했으며, 이때 김성수(金性洙)·송진우(宋鎭禹)·안재홍(安在鴻)·장덕수(張德洙)·김도연(金度演)·백관수(白寬洙) 등 일본 유학생들과 사귀었다. 2년 후인 1916년에 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하였다.

1918년에 전남 무안(務安)의 박영선(朴永善)의 둘째 딸 춘자(春子)[후일 혜순(惠淳)으로 개명]와 결혼했다. 부친 김학모가 조선총독부의 관리로 진출할 것을 강요했으나 경제계로 진출하였다.

[사회경제활동]

1925년에 부친의 사망으로 약 825정보(町步)의 논을 비롯한 1천여 정보를 상속받은 김종익은 순천에 대평농장(大坪農場)을 설립하였다. 김종익은 대평농장을 근대적인 방법으로 경영하며 소작인들의 고충을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김종익의 부친은 물론이거니와 김종익 역시 이른바 ‘악질 지주’로 거론되기도 했다. 김종익은 주민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순천시 월등면 대평리순천시 황전면 괴목리를 잇는 약 4㎞의 도로를 자비로 확장해주었다. 나아가 소작 농민의 자작농화를 추진하는 한편, 농민들의 권업과 저축을 장려함으로써 농촌의 빈곤을 추방하기 위한 일에도 앞장섰다. 재해로 인해 기근과 흉년이 들면 소작인들의 세금을 대납해주기도 했다. 이로 인해 순천의 월등면 등에는 김종익을 기리는 시혜비(施惠碑)가 건립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김종익은 전라남도에 18,000원을 기부하여 1926년에 전남육영회(全南育英會)[유도창명회의 후신]의 발족에 앞장섬으로써 지역인재 양성에 공헌했다. 한편, 1932년경 김종익은 부친 김학모의 유고집 『묵초시고(墨樵詩稿)』를 간행했다.

1933년에 아들 김두수(金杜洙)가 태어나자 조선나병예방협회(朝鮮癩病豫防協會) 및 조선적십자사(朝鮮赤十字社)에 거액을 기부하였다. 1934년에도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개교 30주년기념사업회의 실행위원 및 발기인으로 활동하며 1만 2,000원을 기부하였다. 순천의 농업학교 설립에 필요한 기금 4만 5,000원을 기부함으로써 1935년 5월에 순천공립농업학교가 개교할 수 있었다. 또한, 김종익은 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박녹주(朴綠珠) 등이 주도하는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를 후원함으로써 민족음악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1936년에 김종익은 폐결핵에 걸린 딸 김평수(金平洙)[1923~1936]를 먼저 세상을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어린 딸의 죽음을 계기로 경성여자의학강습소의 이사로 활동하며 여의사 양성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 같다.

한편, 김종익은 1920년대 중반 조선제지주식회사에 3만 원을 투자하여 본격적인 경제활동에 나섰다. 특히 김종익은 토지에서 나오는 소작료를 증권에 투자함으로써 농업자본의 산업 자본화를 추진했다. 예컨대, 김종익이 투자한 회사는 조선지(朝鮮紙)·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동일은행(東一銀行)·조선저축은행(朝鮮貯蓄銀行)과 같은 금융회사, 조선철도(朝鮮鐵道)·조선경남철도(朝鮮京南鐵道)·조선경동철도(朝鮮京東鐵道)·금강산전기철도(金剛山電氣鐵道)와 같은 철도회사, 화성자동차(華城自動車)·친화무역(親和貿易)·조선취인소(朝鮮取引所) 등 매우 다양한 편이었다. 1933년 6월에는 경영난에 빠진 조선제사주식회사를 인수하여 직접 경영에 참여했다. 김종익은 일본 유학 시절 친밀하게 지내던 김양수(金良洙)·이인(李仁)·옥선진(玉璿珍) 등과 더불어 조선제사주식회사를 1백만 원의 자본금을 갖춘 회사로 성장시켰다. 나아가 조선 최초의 증권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자본의 원동력으로 삼고자 하였다. 하지만 갑자기 세상을 떠남으로써 민족자본가로 성장하여 독립을 도모하려던 경제 구국의 꿈이 좌절되고 말았다.

[육영사업]

김종익은 1937년 5월 6일 경성제국대학교(京城帝國大學敎) 부속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1937년 5월 9일 서울역 광장의 영결식을 김성수, 송진우, 이인 등이 주관하였고, 사람들은 고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1937년 5월 14일 순천군수 구자경(具滋璟)의 사회로 순천읍 성동교(城東橋) 광장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해룡면 해창리에 위치한 앵무산(鸚鵡山) 선영에 안장되었다. 김종익의 죽음은 조선의 경제계에 큰 손실이었으나, 교육계에는 커다란 변화를 초래했다. 김종익은 임종 직전에 자신이 모은 전 재산 175만 원을 육영사업을 비롯한 사회 공익사업에 희사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朝鮮日報)』 1937년 5월 7일 자에 실린 기사를 살펴보면 김종익의 육영사업에 대한 열정을 확인할 수 있다.

“문화기관과 사회시설의 빈약한 조선 사회에 병마와 싸우다 못해 임종의 최후일각을 앗기어가며 175만 원이란 거대한 사재(私財)를 교육사업을 비롯하여 사회사업에 기부하라는 엄숙한 유언을 남기고 간 근래에 듣기 드문 독지가의 쾌 소식이 있다. 김종익은 조선제사주식회사 사장으로 순천읍에 고향을 두고 현재 부내 동숭정 129번지에 거주하는 김종익[52세] 씨로 지난 4월 26일 이래 급한 병을 얻어 대학병원에 입원 치료 중 6일 오후 9시 15분 드디어 별세 [중략] 허약한 기운에 최후의 힘을 모두어 더듬는 말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유언서 작성을 마치자 얼굴에 미소를 띠며 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요컨대, 김종익은 임종 직전에 175만 원이라는 거금을 육영사업을 비롯한 사회 공익사업에 내놓았다. 175만 원은 당시 동양 최대의 기부금이었다. 따라서 이와 관련된 내용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물론이거니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에도 여러 차례 보도되었다. 총 175만 원의 기부금은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설립에 30만 원, 경성여의전의 요양원 건립에 35만 원, 순천의 중등학교 설립기금으로 20만 원, 순천 소재의 묵초육영회(墨樵育英會) 신설 기금으로 60만 원, 순천의 공공사업에 10만 원, 서울의 사회사업에 20만 원이 쓰일 예정이었다.

김종익이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및 부속병원에 해당하는 평수기념요양원의 설립에 거금을 기부한 것은 김종익의 딸 김평수의 죽음과 관계가 깊을 것이다. 폐결핵에 걸린 김평수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던 것을 계기로 김종익은 조선 여성을 치료할 여의사의 양성이 매우 절실한 상황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김종익의 유언에 반영되었고, 김종익이 바란 대로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는 1938년 5월에 개교하였다. 김종익의 기부금으로 고향인 순천에 세워진 학교로는 순천고등보통학교[1938]와 순천여자고등보통학교[1940] 등을 들 수 있으며, 역시 김종익의 기부금으로 이미 1935년에 설립된 순천공립농업학교[현 순천대학교]는 을종학교에서 갑종학교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김종익의 유언에 의해 묵초육영회도 설립되었다. 묵초육영회는 처음에 60만 원의 기금으로 설립될 예정이었으나, 경성여의전의 설립기금에 10여만 원을 충당한 관계로 47만 원의 재단법인으로 설립되었다. ‘묵초’는 김종익의 부친 김학모의 호이므로, 김종익에게 막대한 재산을 상속해준 아버지를 기리려는 뜻임을 엿볼 수 있다. 묵초육영회는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발상인 서울에 “학료(學寮)”, 즉 기숙사를 지어 숙식을 제공하는 장학재단으로 계획되었다. 불우한 환경으로 인해 공부할 수 없었던 순천의 인재들이 묵초장학금으로 교육의 혜택을 누려 각계 전문가로 성장한 사람이 적지 않다. 김종익이 평소에 “사재(私財)라고 해서 개인의 사치 호사에 쓰는 것을 당연한 체하는 사람은 재산이 무엇인지 사회가 어떠한 것인가를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가장 비천한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다시 말해 김종익은 개인 재산의 사회 환원이라는 신념을 실천한 인물이었다. 김종익이 살아생전에 육영사업을 비롯한 사회 공익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처럼 김종익은 조선 여성을 위한 의학교육과 지역 인재의 양성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소외당하는 한센병의 예방과 치료를 위해 김종익의 재산을 아낌없이 희사하였다.

[추모와 상훈]

순천에는 김종익을 기리는 조형물이 적지 않다. 순천고등학교순천여자고등학교에 장학기념비가 1942년과 1994년 건립되었다. 순천대학교에는 우석김종익선생기념비[1969]가 세워져 있으며, 죽도봉공원에는 우석김종익선생기념사업회에서 1995년에 세운 동상이 있다. 김종익의 육영정신을 계승하려는 순천 시민들의 열망이 담겨 있다.

[의의와 평가]

「우석선생소전(友石先生小傳)」을 남긴 심영섭(沈英燮)은, 김종익이 “지금은 지하운동을 해서는 안 되네. 우리 민족은 교육을 해야 하네. 그러자면 근검절약하며 근검저축하여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하네.”라고 말했다 한다. 즉, 우리 민족의 진로를 교육과 경제발전에 두었음을 알 수 있다. 김종익은 평생 그것을 실천에 옮긴 진정한 육영사업가이자 민족자본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김종익의 경제활동과 육영사업은 민족운동의 목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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