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600344
한자 壬戌順天農民抗爭
영어공식명칭 Imsul Suncheon Peasant Resistance Movement
영어음역 Imsul Suncheon Peasant Resistance Movement
영어공식명칭 Imsul Suncheon Peasant Resistance Movement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순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62년 5월 15일연표보기 - 임술순천농민항쟁 시작
발단 시기/일시 1862년 5월 15일 - 임술순천농민항쟁 박명식 주도
전개 시기/일시 1862년 5월 15일 - 임술순천농민항쟁 농민 3천여 명이 집회
전개 시기/일시 1862년 5월 15일 - 임술순천농민항쟁 저녁 6시 순천읍성 안으로 진입
전개 시기/일시 1862년 5월 16일 - 임술순천농민항쟁 이방 김백권 타살
전개 시기/일시 1862년 5월 17일 - 임술순천농민항쟁 순천부사 서신보를 만남
전개 시기/일시 1862년 5월 17일 - 임술순천농민항쟁 전임 이방 김진열 타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62년 5월 26일 - 임술순천농민항쟁 삼정이정청 설치
전개 시기/일시 1862년 5월 29일 - 임술순천농민항쟁 순천부사 서신보 파면, 신임 순천부사 박홍양 임명
발생|시작 장소 순천 낙안읍성 -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충민길 30[동내리 437-1]지도보기
종결 장소 순천 낙안읍성 -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충민길 30[동내리 437-1]지도보기
성격 농민항쟁
관련 인물/단체 박명식|서신보|김원성

[정의]

1862년 전라남도 순천 지역의 농민들이 수령과 향리들의 조세 수취의 부정 행위 등에 항거해 일으킨 농민항쟁.

[역사적 배경]

세도정권기 삼정문란으로 표현되는 통치 질서의 이완과 문란으로 인해 농민들은 극한상황에 내몰렸다. 임계점에 달한 농민들의 분노는 1862년(철종 13) 한꺼번에 타올랐다. 1862년 2월 4일 경상도 단성에서 처음 일어난 농민항쟁은 1862년 5월까지 각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전라도에서는 1862년 3월 말 익산의 농민항쟁을 필두로 1862년 5월에 절정에 이르렀다. 충청도에서도 대부분 1862년 5월에 일어났다. 이 시기는 춘궁기로, 농민항쟁의 동기 또는 계기가 농민들의 생활에 직결되는 경제적 문제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농민항쟁이 각지에서 일어나자 조선 정부도 심각성을 인식하고 대책 마련에 고심하였다. 이정청의 설치 등 다양한 대책 마련을 약속하였고, 그 결과 1862년 6~8월 사이에는 농민항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정부의 대책이 임기응변에 불과했음이 드러나고 이정청마저 폐지되자 1862년 9월부터는 농민항쟁이 더욱 확산되었다. 이때는 경기, 함경도, 황해도까지 확산되었다. 1862년 한 해 동안 농민항쟁이 일어난 지역은 71개 군·현이다. 그중 전라도에서는 38개 군현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농민항쟁은 경상도 단성에서 시작되었지만, 전라도에서 가장 활발했다. 그것은 전라도가 지닌 곡창지대로서 위상 때문이었다. 전라도는 넓은 평야가 있고 영산강 등의 큰 강이 흘러 일찍부터 곡창지대로 주목받았다.

순천은 호남에서 행정과 유통경제 중심지의 한 곳으로, 농·수산물을 포함한 물산이 풍부한 지역이었다. 남수문이 쓴 기문에 따르면, 순천은 “물산의 풍부함이 남쪽 고을에서 제일”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순천의 토지가 논과 밭을 합하여 1만 2000여 결에 이르렀고, 논의 비율이 밭보다 높은 곳이었다. 이 때문에 순천에서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조세 수취를 빙자한 향리들의 부정이 심하였다. 환곡과 토지세에서 부정한 수취가 있었고, 법 규정을 넘어서는 부가세 징수의 피해가 컸다. 순천 농민들은 이러한 향리들의 부정행위와 이를 묵인하는 당시 순천부사 서신보에게 그 부당함을 지적하고 나선 것이었다.

[경과]

순천의 농민항쟁은 1862년 5월 15일 시작되었지만, 그 이전부터 순천부에서 자행되는 여러 가지 폐단을 바로잡자고 주장하는 익명의 통문이 돌았다. 그리고 1862년 5월 15일 정오가 되자 농민항쟁이 시작되었다. 농민항쟁을 주도한 이는 박명식이었다. 순천읍성 남문 밖 3리[약 1.2㎞]쯤 떨어진 곳, 순천읍성 동문 밖 환선정이 있는 천변 두 군데에 약 3,000여 명의 농민들이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모두 이마에 흰 수건을 두르고 죽창을 지닌 상태였다. 이곳에서 농민들은 공격할 대상과 순천부사에게 요구할 조건들을 의논하였다. 그리고 날이 저문 시각인 저녁 8시를 기해 바로 순천읍성 안으로 진입하였다. 봉기에 참여한 농민들은 순천읍성에 진입하자 먼저 이방 김백권과 전임 이방 최응임의 집을 부수고 불태웠다. 동시에 민가 36호도 공격하여 부수었고 향청의 좌수, 향리, 사령 등 관속을 만나면 거의 죽기 직전까지 구타하기도 하였다. 관청에 소속된 이들은 모두 조세 수취의 부정에 가담한 공범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농민들은 돈과 곡식을 탈취하였는데, 이때의 행동이 명화적(明火賊)과 다를 바 없었다고 평가하는 기록도 있다.

이튿날인 1862년 5월 16일에는 현임 이방 김백권을 타살하였다. 이어 향리들의 집무소인 질청(作廳)과 형벌을 관장하는 형청(刑廳)을 습격하여 각종 문서와 장부를 남김없이 불태우고 공전(公錢)을 빼앗았다. 그리고 질청과 형청의 창과 벽을 훼손하였고, 군노청 역시 허물어버렸다. 전임 이방 최응임을 밤늦게까지 붙잡아두고 모욕을 주었다.

1862년 5월 17일 3,000여 명의 농민들은 관청에 들어가 순천부사 서신보를 상대로 환곡·결세의 폐단과 조세를 억울하게 납부한 사정을 설파한 다음 전임 이방 김진열을 타살하였다. 저녁이 되어 해산하면서 면·리를 횡행(橫行)하며 인가를 부수고 소들을 빼앗았다.

순천 지역의 농민항쟁 과정을 보면 두 가지 특징이 보인다. 하나는 순천의 항쟁이 조직적이고 계획적이었다는 점이다. 집결 장소를 나눔으로써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죽창을 지니게 함으로써 조직을 갖추고 행동 통일을 기하는 한편 피아(彼我)를 구분하는 효과도 노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만 농민들의 불만을 적극적으로 통제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항쟁 과정에서 명화적과 다를 바 없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일반 민가에서 심한 약탈을 하였고, 해산할 때도 소를 빼앗는 등의 태도를 보이는 데서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다른 지역보다 과격한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순천 지역 역시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수령에 대한 공격은 자제하고 있으나, 관속들을 죽이고 토호와 부민들에 대한 공격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 과격하였다. 전·현임 이방을 타살하고, 상당수 관속에게는 중상을 입을 정도로 구타했다. 특히 공공건물을 파손하고, 공문서 및 공적인 재물을 불태우거나 약탈한 행동은 중앙정부의 주목을 끌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조직적이고 과격한 농민군에 비해 순천부사 서신보의 대응은 매우 소극적이었다. 서신보는 중앙정부에 올린 첫 번째 보고서에 의하면, 주동자와 적극 가담자의 신원을 파악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농민들의 요구 조건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였다.

[결과]

농민항쟁 초기 관대한 정책을 펴던 조선 정부는 1862년 4월 21일 함평에서 격렬한 형태를 띠자 강경책으로 돌아섰다. 특히 1862년 5월 이후 전라도 각지로 농민항쟁이 확산되자 강경책만이 효과적인 수습책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특히 1862년 5월 18일 「전라감사장계」를 통해 올라온 순천농민항쟁 소식은 철종까지도 경악하게 하였다. 철종은 향리를 구타한 것에 그치지 않고 타살한 것, 민가를 불태운 데 그치지 않고 노략질한 것, 거리낌 없이 공전을 약탈하고 공해를 부순 사실을 대변괴라 인식하고, 공권력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사태를 한탄하였다. 또한, 비변사에서는 공해를 부수고 공전을 약탈한 농민들을 갈수록 난폭해지는 무리로 판단하고, 이들을 녹림지도, 즉 산적에 비유하며 강력하게 대처할 것을 천명하였다. 그리하여 1862년 5월 29일 농민항쟁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순천부사 서신보를 파면하고, 박홍양을 신임 순천부사에 임명하였다. 아울러 농민항쟁 관련자에 대해서는 전라감영에서 자체적으로 먼저 처벌한 다음 중앙정부에 보고하도록 명하였다. 그 결과 전라감영에서는 “박명식 등이 간리배 등의 농간에 격분하여 난을 일으켰으며 이때 훼손된 민가는 39호였으며 주동자들을 조사한 후 처벌하였다.”라고 보고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조선 정부는 농민항쟁에 대한 강경책에도 불구하고 진정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였다. 농민항쟁의 주된 원인이 삼정 문란에 있다고 파악하고, 개혁안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1862년 5월 26일 삼정 운영을 개혁하는 주무관청으로 ‘삼정이정청’을 설립하고, 정원용, 김흥근, 김좌근, 조두순을 총재관, 김병국, 김병익 등을 당상관으로 임명하여 업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1862년 6월 12일부터 8월 27일까지 재야 유생층과 관료들에게 개혁책을 널리 모집한 후 1862년 윤8월 19일 삼정이정책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군정(軍政)과 전정(田政)에서는 민원이 없도록 개혁했으며 환정(還政)에 대해서는 23개 조의 수습 방법을 들어 시정(是正)했다. 하지만 이때의 삼정이정책은 삼정 운영을 개선하는 데 그쳤을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시행되지도 않았다. 너무 서둘러 개혁안을 마련한 탓에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개혁안을 포기한 것이다. 이 때문에 잠시 잠잠했던 농민항쟁은 다시 재발하였고, 순천에 인접한 광양에서도 1869년 3월 24일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의의와 평가]

임술년에 순천에서 일어난 농민항쟁 역시 당시 모순구조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에 대한 구조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수준으로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당시 모순이 향리를 비롯한 중간 지배층의 부정과 탐학에서 기인한 것으로 파악하고, 그에 대한 응징의 형태에 머물고 있다. 한편, 부정부패에 대한 이러한 저항 경험은 이후 갑오농민전쟁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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