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600448
한자 松廣寺高峯和尙塔
영어공식명칭 Stupa of Buddhist Monk Gobong of Songgwangsa Temple
영어음역 Stupa of Buddhist Monk Gobong of Songgwangsa Temple
영어공식명칭 Stupa of Buddhist Monk Gobong of Songgwangsa Temple
이칭/별칭 고봉화상탑
분야 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탑과 부도
지역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송광사안길 100[신평리 12]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엄기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350년 - 법장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428년 7월 21일 - 법장 사망
건립 시기/일시 1430년연표보기 - 송광사 고봉화상탑 건립
현 소재지 순천 송광사 -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송광사안길 100[신평리 12]지도보기
성격 부도|승탑
양식 팔각당형
관련 인물 고봉화상 법장
재질 화강암
크기(높이) 2.2m
소유자 순천 송광사
관리자 순천 송광사

[정의]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송광사에 있는 조선시대 승려 고봉화상의 부도.

[건립 경위]

송광사 고봉화상탑순천 송광사 출신 16세로 마지막 국사였던 고봉국사(高峰國師) 법장(法藏)[1350~1428]의 부도로 조선시대 건립되었으며, 다른 국사들의 부도와 마찬가지로 2세 국사의 부도였던 송광사 진각국사 원조탑의 양식을 충실하게 계승하였다. 순천 송광사에 남아있는 고봉국사 법장의 행적에 의하면 1428년(세종 10) 7월 21일 게송을 남기고 입적하자, 문도들이 화장한 후 유골을 수습하여 침실에 안치하였는데 1429년 3월 28일 문인 신준 등 5인이 이상한 향기를 맡고 함을 열자 영롱한 사리 2과를 얻게 되었다. 또한, 1430년 3월 24일 정근하여 사리 12과를 얻는 등 모두 37과의 사리를 얻었으며, 그해 가을에 부도를 만들기 시작하여 겨울에 사리 봉안과 송광사 고봉화상탑 건립 공사를 마쳤다고 한다. 당시 사리 큰 것 4과와 유골을 수정통에 담아 백동으로 만든 통에 넣고, 푸른 명주로 감싸 송광사 고봉화상탑에 봉안하였고 현재까지 사리합이 전해지고 있다.

[위치]

송광사 고봉화상탑순천 송광사 감로암 뒤편으로 형성된 좁은 등산로에서 조계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오른쪽 등산로를 따라가다 보면 왼쪽 능선 위에 있다.

[형태]

송광사 고봉화상탑은 주변에 자연석을 깔아 견고하게 기초를 다진 후 건립하였다. 지대는 2단으로 마련되었는데, 하단은 외곽에 4매의 장대석을 결구하였으며, 상단은 1매의 대형 사각형 석재를 마련하여 그 위에 기단부를 올리도록 했다. 기단부는 전체적인 평면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하대석-중대석-상대석을 순서대로 올렸다. 상대석은 하부에 1단의 받침을 두고, 그 위에 단판 12엽의 앙련문을 장식하였다. 상대석 상면은 가운데에 팔각의 돋을대를 마련하여 그 안쪽으로 팔각 탑신석[탑의 몸체]이 결구 되도록 했다. 탑신석은 팔각 석주형의 1석으로 다듬었다. 남면에는 세로로 긴 사각 형태로 위패형 액방(額方)[42×6.5㎝]을 마련하여 그 안에 ‘고봉지탑(高峯之塔)’이라고 새겨 부도의 주인공을 알 수 있도록 했다.

옥개석[지붕돌]은 하부에 좁은 2단의 받침과 넓은 1단의 받침을 마련하였으며, 처마부는 수평으로 치석 하였다. 낙수면은 가운데를 오목하게 하여 유려한 곡선을 이루도록 치석 하였으며, 마루부는 높게 돌출시켰다. 상륜부는 옥개석 정상부에 낮은 받침대를 마련한 다음, 하부에 복련문이 장식된 복발형[엎어놓은 그릇 모양의 장식] 받침대를 올렸다. 그리고 그 위에 낮은 원형 받침대와 연화문이 장식된 넓은 원형 받침대, 다시 낮은 원형 받침대를 마련하였다. 정상부에는 뾰족한 원형 보주석[탑의 가장 꼭대기에 위치하는 부재로서 구슬 모양]을 올려 마무리하였다.

[금석문]

고봉국사 법장은 현판에 행적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 후기 최눌(最訥)[1717~1790]이 1774년(정조 8) 8월 1일 다리를 수리하고 동쪽 방장의 대들보에 걸려 있는 옛날 현판을 내려 보니 고봉국사 법장의 행장을 기록한 것이었다고 한다. 현판이 검게 되어 내용을 잘 알아볼 수 없자 최눌이 문인이었던 유정(有正)과 함께 검은 것을 파내고, 예전에 기록된 행장과 대비하여 교정하였다. 그리고 발문을 덧붙여 문권(文卷)을 만들었다고 한다. 고봉국사 법장의 행장을 기록한 문권은 1774년 최눌이 교정하고 유정이 써서 전해지게 되었다.

[현황]

산의 능선 위에 있는 송광사 고봉화상탑 주변의 지면은 자연석에 가까운 박석을 깔아 견고하게 다져져 있다. 송광사 고봉화상탑도 도굴꾼들에 의하여 도괴되기는 했지만, 부재의 결실 없이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에는 억불숭유 정책으로 인하여 불교계가 위축되고 승려에 대한 예우가 낮아지면서 부도의 건립이 극히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조선 전기는 부도의 건립이 많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현재 남아 있는 수량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건립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송광사 고봉화상탑은 조선 초기 부도의 한 예로서 부도의 양식을 고찰하는데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또한, 순천 송광사 출신 마지막 국사의 부도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