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600609
한자 崔碩
영어공식명칭 Choi Seok
영어음역 Choi Seok
영어공식명칭 Choi Seok
분야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남도 순천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이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277년 - 최석 제주도 흉년 구휼 관료로 파견
활동 시기/일시 1281년 - 최석 비서랑 임명
부임|활동지 최석 부임지 - 전라남도 순천군
성격 문관
성별
본관 미상
대표 관직 승평부사|비서랑

[정의]

고려 후기 순천 지역에서 승평부사를 역임한 문관.

[개설]

최석(崔碩)은 고려 충렬왕 때 승평부사를 지내고 물러나면서 관례로 받던 말 여덟 마리를 받지 않고 돌려주었고, 이후 그러한 관행이 없어지게 한 인물이다.

[가계]

최석의 가계나 본관 등 구체적인 인적 사항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고려사(高麗史)』에 딱 두 번 언급된 인물로 고려시대의 명문가 출신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활동 사항]

최석의 활동 사항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알려져 있다.

첫 번째는 제주도의 흉년을 구휼하는 관료로 파견된 것이다. 1277년(충렬왕 2) 지금의 제주특별자치도인 탐라에 큰 기근이 들어 굶어 죽는 자들이 속출하였다. 심지어 전 가족이 굶어 죽는 일도 있었다. 이에 고려 정부에서 최석을 파견하여 진휼하게 하였다.

두 번째는 1281년(충렬왕 7) 승평부사였던 최석을 비서랑(秘書郎)에 임명한 것이다. 비서랑은 고려시대 경적(經籍)과 축문(祝文) 작성 등에 관한 일을 담당한 비서성의 종6품 관직이다. 최석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승평부사에서 비서랑으로 교체되면서 행한 행동이다.

당시 승평부에서는 수령이 교체되어 가면 말 여덟 필을 마음대로 골라서 가질 수 있는 관행이 있었다. 그러나 최석은 서울까지 갈 수만 있으면 되는데, 굳이 고를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좋은 말을 고르지 않았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말을 돌려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최석과 동행했던 아전은 그 말을 받지 않으려고 하였다. 최석은 아전이 자신의 행동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속으로는 말을 갖고 싶으면서도 겉으로만 사양하는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이었다. 최석은 자신이 승평부사로 근무할 때 자기 소유의 암말이 새끼를 낳았는데, 그것을 자기가 가지고 왔었다. 이 때문에 아전이 자신을 오해한다고 판단하였다. 최석은 자신의 진심을 보이기 위해, 자신 소유의 말이 낳은 망아지까지 딸려 보냈다. 승평부사로 재임하는 동안에 자신 소유의 말을 먹인 먹이는 순천의 재원이고, 따라서 그 말이 낳은 새끼의 소유권도 순천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행동으로 자신은 여덟 마리의 말에 아무런 욕심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고, 마침내 아전은 여덟 마리의 말을 끌고 순천 지역으로 내려왔다.

[상훈과 추모]

최석은 승평에서는 교체되어 돌아가는 관원에게 말을 골라가게 했던 폐단을 없앴다. 고을 사람들이 그 덕을 칭송하여 비석을 세웠는데, 이를 ‘팔마비(八馬碑)’라 이름하였다. 고려 충숙왕 때 쓰러진 팔마비를 최원우(崔元祐)가 다시 세웠으며, 지금도 전라남도 순천시에는 팔마비가 남아있다. 순천팔마비최석의 청렴함의 상징물일 뿐만 아니라, 순천의 정신으로 지금도 숭상받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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