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산을 노래한 불교 문학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601265
한자 曹溪山-佛敎文學
영어공식명칭 Buddhist Literature that praise Jogyesan Mountain
영어음역 Buddhist Literature that praise Jogyesan Mountain
영어공식명칭 Buddhist Literature that praise Jogyesan Mountain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순천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집필자 조태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지명 송광사 -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송광사안길 100[신평리 12]지도보기
관련 지명 선암사 -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선암사길 450[죽학리 802]지도보기

[정의]

전라남도 순천시 조계산에 있는 순천 송광사순천 선암사의 불가 인물들이 노래한 선시.

[개설]

조계산은 전라남도 순천시 소재 3개 읍면에 걸쳐 있는 산이며, ‘송광산’으로도 부른다. 조계산에는 서쪽 사면에 승보종찰 송광사와 동쪽 사면에 태고총림 선암사라는 두 개의 유서 깊은 절집이 있다. 송광사(松廣寺)는 고려 중기의 고승인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당시 타락한 고려 불교를 바로잡아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한 정혜결사(定慧結社)의 근본 도량으로, 지눌의 제자 혜심(慧諶)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까지 16명의 국사를 배출했다고 해서 승보종찰(僧寶宗刹)이라고 불린다. 선암사대각국사 의천이 교종의 입장에서 선교 양종의 회통(會通)을 시도한 천태종의 중심 도량이다. 조계산의 이 두 절집은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에도 수많은 고승을 배출한 선교 양종의 대도량이다.

[조계산의 불교 문학]

‘송광’이라는 절 이름은 조계산의 옛 이름인 ‘송광산’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전에 따르면 이 산이 장차 ‘18공(十八公)이 배출되어 불법을 널리[廣] 펼 훌륭한 장소’이기 때문에 ‘송광’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는 소나무 ‘송(松)’ 자를 ‘18공’으로 파자하고, ‘광(廣)’을 ‘불법광포(佛法廣布)’의 뜻으로 해석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송광사의 불교풍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회화가 바로 승보전 벽에 그려진 「십우도」이다. 마음을 닦아 해탈을 구하고, 그것을 중생들에게 회향(廻向)하는 구도의 정신을 일반 대중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림과 시를 통해서 표현한 특이한 형태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십우도」를 ‘읽으면’ 아주 자연스럽게 불가의 노래, 선시의 세계에 입문할 수 있게 된다.

이곳 송광사의 불교 노래는 진각국사 혜심(慧諶)[1178~1234]으로부터 시작된다. 혜심은 지혜가 뛰어나고 시문에 능한 사람이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남긴 저술에는 각종 어록과 시집 등이 있는데, 이 중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은 불후의 찬술이라고 평가받는 저술이다. 『선문염송집』은 1226년(고종 13)에 출간된 것인데, 그가 자신의 문하였던 진훈(眞訓) 등과 더불어 고칙(古則) 1,125종과 여러 조사의 염송 329종을 모아, 총 30권으로 묶은 저술이다. 『선문염송집』에 남겨진 혜심의 선시는 선의 본질적 측면을 표현하는 본연의 임무와 더불어 다양한 형식의 선시를 구사함으로써 그 지평을 보다 넓혔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원감국사 충지(冲止)[1226~1292]는 현 전라남도 장흥에서 출생하였고, 17세에 사마시를 거쳐 19세에는 장원을 하기도 하였다. 충지는 한때 관직을 제수받아 복무하던 중에 일본으로 건너가 외교관으로서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며 국위를 떨치기도 하였다. 충지는 어려서부터 출가의 뜻이 있었으나 부모님의 만류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29세 되던 해에 제5대 국사인 원오(圓悟)에게 나아가 출가를 허락받고 수계하였다. 충지의 시는 비교적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편으로 다른 선사와는 달리 문학 작가로서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는 편이다. 충지의 시는 사회시로 주목을 받고 있으며, 시적 특징으로 ‘솔직성’, ‘자연과 사람에 대한 사랑’, ‘소재의 다양성’ 등이 꼽힌다. 충지의 사회시는 조선시대 임진왜란기에 지어진 불가의 선시에도 그 영향을 미쳤다.

부휴(浮休)[1543~1615]는 조선 중기의 선사로, 청허 휴정(休靜)과 더불어 조선시대 불교와 불가 문학의 양대 산맥을 형성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부휴의 선시는 ‘선 수행 전통의 계승’, ‘담담한 선취의 표출’, ‘유·불의 무애(無碍)한 교섭’, ‘국난(國難)에 대한 우려와 고뇌’를 담고 있다고 평가를 받는다. 부휴는 청허 휴정 등이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에 처해서 역사의 현장에 뛰어들어 적극적으로 대처했던 것과는 달리, 현실에 참여하지는 않고 오로지 수행에만 힘쓴 인물이었다. 부휴가 당대의 현실에 직접 뛰어들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밝혀진 바는 없지만, 신체적인 불편함과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선천적인 온건함 때문이었다고 추측된다.

침굉대사(枕肱大師)[?~1684]는 송광사선암사 등을 두루 거친 스님이다. 태능선사의 제자 중 문집이 남아 있는 유일한 승려이기도 하다. 유·불·선을 섭렵한 분으로도 유명하다. 침굉대사가 남긴 시문은 선기를 크게 드러냄이 없으면서도, 그 문장의 수려함이 어느 문필가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평을 받고 있다. 침굉대사는 말하려는 뜻과 대상을 선시이기 이전에 시로 승화시켜, 진리를 드러내는 듯 숨기는 듯 드러내어 선과 시가 둘이 아닌 하나요, 하나가 아닌 둘로 발현시키는 데 뛰어났다고 한다.

이 밖에도 조계산과 인연이 깊은 인물로 교행(敎行)을 중시했던 백암대사(柏庵大師)[1631~1700]는 송광사에서 보조국사비송광사 사적비를 세웠다. 백암대사가 지은 연작시 「정토찬(淨土讚)」은 게송 문학의 걸작으로 꼽힌다. 무용당(無用堂)[1651~1719] 또한 조계산 송광사와 인연이 깊은 인물이며, 스스로 아무 쓸모가 없다는 뜻을 담은 ‘무용(無用)’을 당호로 삼았다고 한다. 무용당은 주로 속인들과 시를 나누었는데, 『무용당유고(無用堂遺稿)』에 시 65수가 전한다.

[의의와 평가]

조계산의 불교 문학 전통이 이처럼 몇 사람의 노래로 완성되었던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 선시의 오늘이 진각국사 혜심에 의해 시작되어 선승들의 전통으로 남았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원감국사 충지의 선시나 부휴선사의 선시 역시 선시 연구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보면, 조계산의 불교 문학 전통은 특히 이 세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고 계승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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