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601304
한자 護國-順天-順天倭橋城戰鬪
영어공식명칭 Land of Hoguk and Uibyeon, Suncheon Waegyoseong Battle
영어음역 Land of Hoguk and Uibyeon, Suncheon Waegyoseong Battle
영어공식명칭 Land of Hoguk and Uibyeon, Suncheon Waegyoseong Battl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남도 순천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욱

[정의]

정유재란 당시 순천 왜교성에 주둔했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했던 일본군과 조명연합군이 벌였던 왜교성전투의 전개 과정과 그 역사적 의미.

[순천만 옆 왜교성]

전라남도 순천시는 예로부터 관광도시로 사랑을 받고 있다. ‘순천’ 하면 떠오르는 명소가 많다. 천년고찰 순천 송광사, 순천 선암사, 조선의 전통 읍성이 원형 그대로 보존된 순천 낙안읍성, 흔들리는 갈대와 황홀한 낙조로 넋을 뺏는 순천만 등. 그러나 정작 순천의 왜교성, 혹은 왜성을 아는 이들은 드물다. 이 많은 공간 중에서 두 군데밖에 둘러볼 여유가 없는 분이라면, 순천만왜교성을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거리가 가까운 이유도 있지만, 관광에 그치지 않고 생각할 거리를 남기기 때문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자연과 인간의 공존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 커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늘 고민해야 할 문제를 정면으로 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순천만은 굳이 권하지 않아도 순천에 오는 모든 이들이 반드시 들르는 필수 여정이다. 눈 내린 순천만에 흔들리는 갈대, 겨울에 찾아온 수많은 철새, 거기에 해가 넘어가는 시간의 와온해변에 서면 옆 사람의 얼굴마저 물들여버리는 황홀한 낙조, 이것만으로도 순천만은 놓치기 어려운 곳이다. 하지만 거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길 권한다. 순천 송광사순천 선암사, 순천 낙안읍성이 아닌 순천만을 권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순천시 옆에는 전라남도 여수시와 광양시가 있다. 이곳에는 대규모 국가산업단지가 있다. 화학과 제철 산업으로 대표되는 산업단지의 조성은 여수와 광양의 경제력에 크게 이바지했다. 수많은 사람에게 일자리를 제공했고, 지금도 지방 중소도시로서는 윤택한 삶을 누리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를 얻으면 한 가지를 잃는 법이다. 이곳은 경제적인 윤택함을 얻는 대신 좋지 않은 대기 환경을 얻었다. 반면 두 도시 옆의 순천은 산업단지 조성에서 제외되었다. 그 대신 천혜의 순천만을 그대로 보전하는 반대급부를 받았다.

순천만은 인간이 자연을 개발하여 경제적 이익을 얻는 것과 환경을 보전하는 것, 두 가지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어느 쪽에 비중을 두어야 할까, 고민하게 하는 매우 상징적인 곳이다. 순천만의 아름다운 경관에 매몰되지 않고, 인간과 자연의 공존과 공생에 대해 고민하는 기회를 얻어보길 바란다.

그렇다면 이름도 생소한 왜교성순천만과 짝하는 곳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왜교성은 정유재란 막바지까지 일본군이 주둔했던 곳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슬픈 역사가 깃들어있다. 그 역사의 내막을 알게 되면, 평화의 소중함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에 살고 있고, 걸핏하면 전쟁의 위험에 노출되는 우리에게 평화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역사의 현장이다. 인간과 인간의 공존, 그것도 평화로운 공존을 고민하게 하는 곳이다. 왜교성에 깃든 역사, 우리 조상의 피와 땀으로 물들어진 역사, 그것을 알아야 평화도 느낄 수 있다. 이제 그것을 알아보는 발걸음을 시작해보자.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교성 농성]

1593년(선조 26)부터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는 강화 협상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그러나 일본군의 전군 철수를 주장하는 명나라의 요구와 한반도 남부 4도의 할양을 주장하는 일본군의 요구는 접점을 찾기 어려웠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고, 1597년 일본은 조선을 재침략하였다. 정유재란이 시작되었다. 정유재란을 시작하며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전라도의 점령이었다.

정유재란의 전개 상황 역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침에 따라 이루어졌다. 일본군은 전라도를 공격하여 군량을 확보하고 북상하다가, 그것이 여의치 않자 퇴각하여 남해안에 거점을 마련하였다. 일본군은 남해안 곳곳에 거점을 마련했지만, 특히 울산과 사천, 그리고 순천이 일본군의 3대 거점이기도 하였다. 일본군이 순천에 주둔하면서 쌓은 성이 왜교성이었다. 왜교성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일본군이 주둔하였다.

일본군이 퇴각하는 상황에서 매우 짧은 시기에 왜교성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조선 민중들의 피와 땀의 결정체였다. 일본군은 침략 초기부터 부유한 백성들을 대상으로 약탈과 살해를 자행했다. 그 지역에서 의병이 활동할 가능성을 미리 방지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일반 민중들은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을 썼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백성들은 일본군의 약탈과 살육으로 인한 피해도 적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참혹했던 것은 굶주림이었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물자가 모두 고갈된 데다가 거듭된 흉년과 만연한 질병으로 인해 들에서 농부들을 보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설령 농사를 짓는다고 하더라도 극심한 흉년으로 농우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소 대신 쟁기를 끌어야 했다. 농부 8명이 한 개의 쟁기를 끌어야 했다. 그만큼 농업 생산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농민들은 기아선상에 허덕여야 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러한 점을 파고들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순천부 사람들에게 곡식을 주는 대신 민패(民牌)를 나누어 주었다. 민패를 발급받는 것은 일본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민패와 함께 쌀을 받기도 하였지만, 이후에는 그에 따른 세금과 부역의 의무를 져야 했다. 일본군과 그들에게 동조한 조선의 백성들이 한 마을에 거처하면서 농사를 짓게 하고, 수확이 끝나면 민패를 받은 사람들에게 각각 쌀 3말씩을 거두었다. 아울러 승려를 비롯한 조선의 민중을 동원해 왜교성을 쌓는 데 동원하였다. 이들의 협력 덕분에 왜교성은 짧은 시간에 완성되었고, 일본군은 견고한 수비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명나라 장수의 태업과 노량해전]

1598년(선조 31) 7월 명나라 장수 형개(邢玠)는 조명연합육군을 동로, 중로, 서로군으로 편제하여 울산성, 사천성, 왜교성을 각각 공격하게 하고, 또 진린(陳璘)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과 이순신의 조선 수군을 하나로 묶어서 수로군을 편성하여 서로군과 함께 왜교성을 공격하도록 하는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른바 ‘사로병진’, 즉 네 방향의 군대가 한꺼번에 진격하는 작전을 수립하고 시행하였다.

왜교성은 명나라 장군 유정(劉綎)이 지휘하는 서로군과 명나라 장군 진린(陳璘)이 지휘하는 수로군이 함께 공격하였다. 총지휘는 유정, 그리고 조선 장수 권율(權慄)과 이순신(李舜臣)이 보좌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처럼 조선에서 벌어질 전투의 지휘권을 외국 장수가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유정은 전쟁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모습은 처음 전투가 벌어졌던 1598년 9월 20일부터 나타났다. 조명군은 수륙 연합으로 왜교성을 공격하였다. 이때 수군의 전과는 괄목할 만했다. 일본군의 해상기지였던 왜교성 동쪽의 장도(獐島)를 공격하여 적의 군량 300여 석과 우마 등을 탈취하고 조선인 포로 300여 명을 쇄환[다른 나라에서 떠도는 자기 나라 백성을 데려오던 일]하였다. 장도를 차지함으로써 고니시 유키나가군의 퇴로를 차단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육상군은 제대로 전투를 치르지 못했다. 조선군은 전투 의욕에 불타올랐지만, 명나라 장수들은 번번이 작전을 방해하였다.

이후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1598년 10월 3일에는 더 심한 상황이 벌어졌다. 조명연합군은 수륙 합동작전으로 동시에 왜교성을 공격, 점령하기로 하였다. 진린은 유정과의 약속을 굳게 믿고 일본군을 섬멸할 계획으로 총공격을 가하였다. 그리고 진린의 공격으로 일본군 진영에 혼란이 일었다. 이 기회를 포착하여 유정이 이끄는 육군이 공격을 가하였다면 예상외의 전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유정은 전혀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다. 유정의 소극적인 태도는 적극적인 공격에 나선 명나라 수군을 위험에 빠뜨렸다. 진린은 육군이 왜교성을 공략, 점령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일본 선박을 나포하는 데에 몰두했다. 그런데 그때가 썰물이라 자신의 함대가 모래에 얹혀버리는 상황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다. 결국, 명의 전선이 썰물 때문에 모래 위에 얹혀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일본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쳐들어와 명의 선박을 포위하였다. 진린은 조선 수군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났으나, 그 피해 또한 막대했다. 명의 사선 19척이 파괴되고 호선 20여 척이 전소되었으며, 여기에서 명군 수백 명이 전사하였다.

이후로도 유정은 가급적 전쟁을 회피하면서 사세를 관망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 틈을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우선 유정에게 뇌물을 주어 안전한 철병(撤兵)을 확약받았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뇌물을 받은 유정은 진린에게 일본군의 철병을 보장하도록 통고했으나, 진린의 거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유정의 약속을 믿고 묘도(猫島) 쪽으로 10여 척의 배를 보냈다가 수군에게 모두 붙잡혀 죽고 말았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포섭대상을 확대하였다. 진린에게도 뇌물을 준 것이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진린에게 뇌물을 주어 다시 철병을 꾀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순신의 군대에 의해 좌절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다시 한번 진린을 뇌물로 회유하여, 남해에 있는 사위를 불러온다는 명목으로 1척의 작은 배가 포위망을 벗어나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이순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진린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결국, 한 척의 배가 이순신의 수군 옆을 지나쳐 남해로 갔다. 남해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를 기다리던 일본군은 왜교성의 상황을 소상하게 알게 되었고,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원하러 가기로 하였다. 이순신 장군 역시 남해 쪽의 일본군이 고니시 유키나가를 도우러 오리라 예상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좌시하면, 역으로 조명연합수군이 일본군에 협공당할 우려가 있었다. 이순신은 협공당하기 전에 먼저 역공을 취하기로 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도우러 오는 일본군에게 선제공격을 가하기 위해 부대를 이동하여, 노량 앞바다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1598년 11월 19일 새벽, 노량 앞바다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왜교성전투의 마지막 회전이자, 임진왜란 7년 전쟁을 막을 내리는 노량해전의 시작이었다.

[왜교성전투와 조선 민중의 피해]

왜교성전투에서 명나라 군대, 특히 육군은 되도록 전투를 회피하려고 하였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다른 나라를 위한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설 리가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다. 될 수 있으면 전투를 하지 않고 전쟁을 마무리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최선책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휘관인 유정과 진린은 뇌물을 탐하다가 결국 노량해전의 비극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이를 더욱 비극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로 인한 조선 민중들의 피해였다. 명나라 군대가 왜교성에 주둔한 일본군을 포위하자, 그에 대한 조선 민중들의 반응은 열렬했다. 전라도 백성들은 모두 일본군을 섬멸할 시기가 멀지 않다고 여겨 80세 된 노파와 10세 된 아이들까지도 모두 기뻐 뛰며 앞을 다투어 군량을 가지고 와서 군영 앞에 모인 곡식이 한 달 동안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유정은 1598년 10월 7일 순천 부유로 철수하면서 그 군량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 왜교에서 순천까지 쌀이 길바닥에 낭자하였고, 왜교에만 남은 식량이 거의 3천여 석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그 곡식은 불에 태워지거나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조선 민중의 염원이 담긴 쌀이 그렇게 허비되고 말았으며, 또 그만큼 조선 백성들의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한편 일본군의 회유에 넘어갔던 조선의 백성 역시 명나라 군대에 의해 큰 피해를 보았다. 유정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왜교성을 탈출하여 비어 있는 성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빈 성에 무혈입성했으면서도, 전투 끝에 얻은 승리로 포장하고 싶었다. 이를 입증한 수급이 필요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없었다. 수급이 모자랐다. 그러자 일본군에 포로로 잡히거나 그들에게 협력했던 조선 사람들의 수급을 베어 그 수효를 채웠다. 이때 죽임을 당한 조선 사람들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일본군 진영에서 탈출하려고 했으나, 미처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일본군의 회유에 넘어가 가담했던 조선의 백성들이 명나라 장군의 전공 욕심에 희생되고 말았다.

[왜교성전투의 교훈- 평화의 소중함]

전쟁터가 된 나라의 주민에게는 결과와 상관없이 전쟁 자체가 곧 큰 고통이다. 전쟁이 유리하게 전개된다고 하더라도 전쟁에 드는 인적, 물적 자원의 지원은 고스란히 주민들의 몫이다. 그뿐만 아니라 전쟁 과정에서 적국 군사들이 자행하는 만행과 약탈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전쟁터가 된 나라의 주민들은 안팎의 침탈에 지쳐 전쟁이 최대한 빨리 종식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특히 적군이 주둔하고 있던 지역의 주민들에게는 그것이 더욱 절실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상황에 따라 특정 군대의 요구를 받아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며, 그로 인한 책임과 피해도 뒤따랐다.

왜교성전투 당시 조선의 민중들은 삶을 위해 어느 한 편에 서야 했다. 일부 주민들은 삶을 찾아 일본이나 명나라 편에 서게 되었다. 일본군은 전라도를 거점으로 장기전을 구상하였기 때문에, 조선 민중들을 적극적으로 회유하였다. 그들은 굶주림에 시달리는 조선 민중들에게 곡식을 지급하고 조세 감면을 약속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 민중의 협력을 끌어냈다. 그러나 살아남기 위해 일본을 선택했던 그들은 오히려 더 큰 피해를 보았다. 일본군에 가담하지 않았던 조선의 백성들도 피해를 보기는 마찬가지였다. 명나라 군대의 군량 공급 부담과 그들의 침탈이 잇달았다. 그들은 전쟁에 소극적이었으며, 곡식만 허비할 뿐이었다. 결국, 전쟁은 되도록 피해야 한다는 것을, 평화는 목숨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왜교성전투는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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