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601289
한자 麗水順天-事件
영어공식명칭 Yeosu·Sunchoen 10.19 Event
영어음역 Yeosu·Sunchoen 10.19 Event
영어공식명칭 Yeosu·Sunchoen 10.19 Event
이칭/별칭 여순항쟁,여순봉기,여순반란사건,제14연대반란사건,여순사건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순천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주철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8년 10월 19일연표보기 - 여수 순천10.19사건 발생
전개 시기/일시 1948년 10월 20일 - 여수 순천10.19사건 여수군 인민위원회 재조직
전개 시기/일시 1948년 10월 21일연표보기 - 여수 순천10.19사건 반군토벌전투사령부가 토벌작전 시작
전개 시기/일시 1948년 10월 22일 - 여수 순천10.19사건 여수, 순천 지역 계엄령 선포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8년 12월 1일 - 여수 순천10.19사건 「국가보안법」 제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9년 11월 24일 - 여수 순천10.19사건 「계엄법」 제정
발생|시작 장소 여수 순천10.19사건 - 전라남도 순천시
성격 사건|무장봉기
관련 인물/단체 국군 제14연대

[정의]

1948년 10월 19일 여수 주둔 국군 제14연대 병사들이 제주4.3사건의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한 사건이자 순천을 비롯한 전라남도 동부 지역에서 토벌군에 의하여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당한 사건.

[개설]

1948년 10월 19일 여수 주둔 국군 제14연대 병사들이 제주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동족상잔결사반대, 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봉기했다. 군인의 봉기는 미군정에서 이승만 정권에 이르기까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불만이 고조되었던 지역 주민의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정부에서는 강력한 토벌작전을 전개하면서 많은 민간인이 학살되었으며, 「국가보안법」 등을 제정하여 국민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반공체제를 구축하였다.

[역사적 배경]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외치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나 남쪽에는 미군정 시대가 열리고, 북쪽은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국제정세는 자주독립국 건설이라는 염원과 다르게 흘러갔다. 남쪽은 신탁통치 문제로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었다. 이윽고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서 남한만의 총선거가 결정되었다. 총선거를 통한 정부 수립은 남한에 진주한 미군 철수를 전제로 하였다. 기존 도별로 설치된 9개 연대 이외에 6개의 향토 연대[10연대~15연대]를 1948년 5월 1일부터 4일까지 강릉, 수원, 군산, 온양, 여수, 마산 등에 추가로 창설하였다. 여수 제14연대는 1948년 5월 4일 광주의 제4연대 1개 대대를 근간으로 옛 일본군 해군 202부대[일명 수상비행장]에 주둔하였다.

5·10총선거가 결정되면서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는 이른바 제주4.3사건이 발발하여 군경에 의한 제주도민 학살이 자행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제주도 문제는 이승만 정권에게 골칫거리였다. 이에 정부와 미국 임시군사고문단은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사령관 제5여단장 김상겸 대령 겸임]를 설치하면서, 기존 경찰 중심의 진압작전에서 군 주도의 토벌작전으로 전환하였다. 제주도 초토화 작전을 알리는 신호였다.

[경과]

제주도 초토화 작전을 위해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4연대에 출동명령이 하달되었다. 제14연대 군인들은 제주도 출동명령을 거부하며 봉기하였다. 제14연대 군인은 제주도 출동명령을 국군의 사명에 부합하지 않은 부당한 명령으로 간주하였다. 이처럼 여수 순천10.19사건은 군과 경찰의 알력도 작용하였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제주 애국인민을 무차별 토벌하라는 정부의 부당한 명령에 기인하였다. 제14연대 제주도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는 「애국인민에게 호소함」이란 성명에서 ‘동족상잔 결사반대’, ‘미군 즉시 철퇴’를 강령으로 발표하였다. 자국의 군대에 자국민을 학살하라는 명령의 부당함과 이에 직접 연관이 있는 미군이 철수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제14연대 군인을 중심으로 봉기가 발발하자 여수에서는 1948년 10월 20일 오전 여수군 인민위원회가 재조직되었고 오후에는 인민대회를 개최하였다. 인민대회에서 ‘결의안 6개항’을 발표하고 여수 시내 모든 행정기관을 인민위원회가 접수하였다. 여수 순천10.19사건 발발 이후 여수 지역에서만 유일하게 인민위원회가 초보적이나마 행정이 이루어졌다.

정부는 1948년 10월 21일 미국 임시군사고문단의 주도 아래 반군토벌전투사령부[사령관 송호성]를 광주에 설치하고 대대적인 병력을 동원하여 토벌작전에 나섰다. 정부와 미군 임시고문단은 신속히 토벌한다는 목표를 설정하였다. 1948년 10월 22일 여수와 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의 지휘 아래 4F 전술을 전개하였다. “찾아서 고정시킨 후, 싸워서 끝낸다.[Finding, Fixing, Fighting, Finishing]”는 무차별적인 토벌작전은 무수히 많은 민간인 피해로 이어졌다.

[결과]

군인의 봉기는 미군정에서 이승만 정권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사회적으로 불만이 고조되었던 지역 주민에게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특히 경제적 불만이 최고조에 달하던 민중이 호응하고 지지하면서 전남 지역을 비롯해 전라북도·경상남도 일부 지역까지 확산되었다. 1948년 10월 20일 새벽 봉기군은 여수 시내로 진출한 후 순천 방면으로 북상하여, 오후에 순천 시내를 장악하고 지리산[구례·남원] 방면으로 북상하려 했다. 그러나 토벌군과 전투에 패배하고 지리산, 백운산 등으로 입산하여 1955년까지 빨치산 투쟁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이승만은 여수 순천10.19사건을 계기로 반공국가 건설을 명분으로 한 장기집권을 위해 사회를 재조직하고자 하였다. 그 일환으로 국군 내 좌익세력을 척결하는 ‘숙군’으로 삼아 반공 군대로 정화하려 했고, 경찰은 인력을 증가하여 국민의 생활 속에 파고들게 하였다. 교육계도 좌익 교사와 학생을 축출하도록 조직하고, 학도호국단을 결성하여 군사훈련을 일상화하였다. 그 결과 1948년 「국가보안법」, 1949년 「계엄법」을 제정하였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주권재민의 헌법적 가치가 통치권자의 권력에 의해 침해되고 억압되는 반민주주의 악법으로 활용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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