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601305
한자 梅山嶝-順天基督敎-歷史
영어공식명칭 History of Sunchoen Christianity meet in the Maesandeung
영어음역 History of Sunchoen Christianity meet in the Maesandeung
영어공식명칭 History of Sunchoen Christianity meet in the Maesandeung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남도 순천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우승완

[정의]

전라남도 순천시 매산등에서 전개된 순천 기독교의 역사와 근대 도시 순천의 발전상.

[미국 남장로회 순천선교기지]

한국 도시들의 위상이 확립된 것은 개항기 이후이지만 개항지인 경우와 몇몇 도시를 제외하면 대다수의 지방 중소도시들은 일제강점기 이후에 근대 도시로 발돋움했다. 순천시 역시 다른 중소도시의 경우와 다름없이 근대 도시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순천 지역의 도시 근대화는 일본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없다. 순천이란 도시의 근대 역사를 품고 있는 자료들을 살펴보면 이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순천이 근대 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던 촉매제는 무엇이었을까? 이 물음의 답을 찾기 위해 일제강점기의 순천에 대한 기록을 조금만 들춰 보면 미국 남장로회에 의한 ‘순천선교기지[순천선교부]’가 중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순천시에서 미국 남장로회의 선교기지가 당초 계획된 분야별로 시설을 갖춰 활동하기 시작한 시기는 1916년부터이다. 순천에 선교기지의 설립이 처음 결정된 것은 1910년이며, 선교사들이 활동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물리적 공간이 마련된 곳은 1913년 매산등 일대이다. 즉 1913년 봄부터 선교사 거주용 주택을 시작으로 1914년 순천병원[안렉산더병원 설립 전의 순천선교기지 병원], 1915년 여학교, 1916년 남학교 등의 건축이 차례로 완공된다. 이는 사전에 준비된 종합계획에 따라 구축된 선교기지이다. 물론 사전에 마련된 종합계획이지만 실행에 있어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병원의 경우 계획된 건축을 마쳤지만, 군산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했다가 본국으로 돌아간 알렉산더의 기부로 다시 규모를 대폭 확장해서 새롭게 건축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순천선교기지의 구축은 미국 남장로회가 전주, 군산, 목포, 광주에 차례로 선교기지를 설립한 경험을 바탕으로 종합적으로 계획된 처음이자 마지막 선교기지 설립이라는 점에서 한층 의미를 더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미국 남장로회의 순천선교기지 설립 목적은 당연히 기독교 전파였다. 하지만 당시 한국에 선교 수단으로 강구되었던 교육과 의료 활동은 지역민들이 서구의 근대 문물과 접하는 유일한 창구였다. 일제강점기 자료에서 지배자였던 일본은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사법과 경찰 등의 극히 제한적인 시설을 제외하고는 1920년대 말까지 실질적인 시설 투자는 하지 않는다. 교육 시스템도 일본인 자녀를 위한 교육기관인 순천심상소학교[현 순천성동초등학교 전신]는 1915년 이후에는 6년 과정에 고등과 2년 과정이 추가되는 것과 달리, 당시 조선인 학교인 순천공립보통학교[현 순천남초등학교 전신]는 1915년까지 4년제로 운영되고 1941년에서야 고등과가 설치되어 차별이 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12년부터 1913년까지 순천읍성을 통과하는 간선도로 개설로 인한 성곽 관통, 객사나 동문의 훼손 등은 도시개발이 아니라 지배자의 편리에 따라 부분적으로 훼손시킨 것일 뿐이다.

이와 같은 단순 훼손뿐만 아니라 도로 개설이나 관리에 있어서도 과거 조선의 불합리한 관습적 제도를 이용하여 대가의 지급을 없애거나 최소화하였다. 일제강점기에 국도 2호선 구간인 목포-순천 간 도로의 ‘폭도도로’라는 별칭은 동학농민혁명을 해산하는 과정에서 검거된 사람들을 도로 공사에 투입해 붙여진 이름으로 역사의 아픈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나마 눈에 띄는 투자라 할 수 있는 1930년 남조선철도주식회사의 순천을 경유하는 광주-여수 구간의 사설철도[지금의 경전선 일부 구간은 국가 소유가 아니었음] 개통 역시 사업자에게 투자자금 이상의 자금 회수를 담보해 결과적으로 조선총독부의 예산으로 일본 본토의 투자자를 배를 불리는 사업이었다. 이에 비해 미국 남장로회의 순천선교기지 설립은 순천의 교육 기관과 의료 기관의 건설로 이어져 순천의 근대 도시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실제로 순천선교기지의 사회활동을 살펴보면 사회활동의 큰 틀은 교육과 의료 분야로 나눌 수 있다. 현재 순천매산중학교, 순천매산고등학교, 순천매산여자고등학교, 그리고 여수애양원으로 알려진 사회복지법인 애양원 등이 교육 분야에 속한다. 여기에 의료 분야에서는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한 선교기지의 강제 철수로 현재는 없어진 안렉산더병원[또는 안력산병원]이 있다. 또한, 실업교육과 각종 기술교육이 더해졌는데, 특히 기술교육 가운데 건축 분야 교육은 그 기술력을 인정받아 다른 지역 선교기지의 나병원 건축을 지원하기도 한다. 그리고 선교기지의 직업교육에 적잖게 힘입은 유기 공정의 산업화는 순천을 반방자 유기를 대표하는 도시로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다시 말해 매산등의 순천선교기지화는 순천이 전라남도 동부 지역의 행정·문화의 중심지이자 교통·지리적 요충지라는 점을 다시 각인시켰다.

[순천선교기지의 정착과 확산]

순천시가 처음부터 전라남도 동부 지역의 선교 거점으로 낙점된 것은 아니다. 순천읍성 공간에 개신교가 자리 잡는 과정에서 인접한 전라남도 보성군의 근대적 도시공간인 벌교읍이 함께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벌교읍은 1900년대 초반까지 중요한 교통로였던 해상교통의 편리성과 함께 시장 상권의 거점이라는 점이 부각된 경우였을 것이고, 순천시는 지역의 전통적인 중심 도시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순천시에 대한 선교사들의 도시발전 가능성의 판단이 수반되어 선교기지가 설립된 것이다.

순천시에 처음으로 개신교의 종교 활동 공간이 마련된 것은 지금의 종교 활동 공간이 아니다. 사실 몇 차례 활동 공간을 옮겨 다니고 나서야 지금의 자리에 안착할 수 있었다. 순천에서 처음으로 집회가 이뤄진 곳은 어디일까? ‘순천노회사’에서 처음 집회한 공간으로 순천읍성 서문 내 개인 주택을 언급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일제강점기에 프레스톤 선교사가 소유한 현재의 호남길과 금옥길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는 주택을 염두에 둘 수 있다. 서문에 인접한 읍성 내 주택에서 출발한 교회는 대지 여건이나 건축 공간이 집회에 유리한 서문 밖의 향교 소유의 양사재를 임대해 교회와 근대 교육의 장소로 활용하였다. 양사재는 향교 밖에 있는 향교의 교육 시설이었으나 향교의 교육 기능이 근대에 새로운 교육체제로 전환되면서 유휴시설로 남겨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양사재에서 매산등 일대의 선교 시설로 점진적으로 자리하게 된다.

순천선교기지의 건축공사는 순천에 앞서 정착한 광주선교기지의 경험이 여러 면에서 적용되었을 것이다. 코잇 선교사가 1911년 미국 남장로회 선교본부에 보낸 편지에는 선교기지의 공사 기간을 1년으로 계획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맨 먼저 착수된 주택들이 완공된 것은 1913년 가을로 당초 계획보다 2년여 늦게 조성된다.

건축물 외관을 구성하고 있는 석재의 공급은 현장 주변과 순천 지역 가까운 곳에 풍부하게 널려 있던 일명 ‘호랑이석’이 사용되었다. 호랑이석은 석재에 포함된 철광 성분이 빗물로 표면에 배어 나와 무늬를 형성한 것으로 질 좋은 석재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으나 선교기지 건축 공사에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공사에 사용된 목재는 조선시대에 국가의 목재 공급원이었던 광양 백운산에서 공급되었다. 임목 벌채는 벌목공과 운반공 2개 그룹으로 분업화되어 진행되었고 현장 가공 후에 하천을 통해 운반했다. 회분은 무게가 150파운드[약 68㎏]나 되었는데, 30마일[약 48㎞]이나 떨어진 곳에서 등짐을 져 걸어서 옮겼다. 특히 회분의 운반은 임금이 매우 낮고 고된 일이었음에도 선호하였는데, 이는 추수 이후 한국인의 근로 기회가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생산되지 않는 시멘트, 미국산 목재, 페인트 등은 인천 개항장의 무역 대행업체를 통하지 않고 미국에서 직접 선박으로 운반하여 조달하였다.

특히 순천선교기지 설립 때부터 등장하는 남장로회 선교기지의 스와인하트(Martin Luther Swinehart)[한국명 서로득] 선교사는 선교기지 건축공사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미국 인디아나주 출신인 스와인하트 선교사는 남장로회 광주선교기지의 건물을 짓거나 수리를 도맡았을 뿐만 아니라 재정 담당으로 텍사스주 철도회사 재직 경력과 다년간의 토목공사 참여 경험이 있었다. 『광주서현교회 90년사』에 따르면 스와인하트 선교사 내한 이전 광주선교기지의 건축 형태가 한식 기와에 단층인 ‘한양절충형’이었으나, 스와인하트 선교사 내한 이후에는 회색 벽돌을 주재료로 사용하고 한식 기와보다는 개량된 평기와나 시멘트 슬레이트를 사용해 외관상 전혀 다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11년부터 시작된 순천선교기지 건설에도 스와인하트 선교사가 감독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한 점을 고려하면 순천선교기지 역시 스와인하트 선교사의 영향이 다양하게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순천 지역 선교기지 건축의 의미와 가치]

미국 남장로교의 호남지역 선교 역사는 한국 교회사를 축소하여 대변하고 있을 정도로, 그 내용에 있어서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189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 선교지역 분할 협정에 따라 남장로회는 전라북도 전주시, 전라북도 군산시, 전라남도 목포시, 광주광역시, 순천시에 차례로 선교기지를 설립한다.

현재 남장로교 한국 선교기지들은 도시 변화로 그 원형이 훼손되었지만, 다수의 건축물이 문화재청 등에 의해 유산으로 관리되고 있다. 순천선교기지는 초기 선교기지의 구성 요소인 선교사 마을, 선교사의 휴양을 위한 수양관 마을, 한센인 관리를 위한 질병 공동체 마을이 조성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선교사 마을은 학교, 병원, 교회, 지원시설이 한국의 취락 구조나 도시 질서 체계인 배산임수와는 다른 독립적인 영역으로 구축되었다. 대중의 접근성을 위해 마을 길 초입에 건축한 순천읍교회가 다시 건축되었지만, 위치는 변함이 없고, 알렉산더병원의 병동, 외국인 어린이학교, 순천 구 남장로교회 조지와츠 기념관, 유교적인 특성이 반영된 남학교는 유산으로 관리되고 있다.

애양리 질병 공동체 마을은 병원, 교회, 병사, 학교 등 주요 건축물을 유산으로 관리하면서 전시시설로 활용하고 있다. 마을을 만들면서 구축된 마을 길, 운동장, 화장장 등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초기의 마을 공간뿐 아니라 이후의 확산 과정까지 확인할 수 있다.

왕시리봉의 수양관 마을은 산악지역에 구축된 마을로 지형적 특성으로 개발 영향을 받지 않아 건축물의 완전성을 유지하고 있다. 처음 조성 당시의 건축물과 함께 운반 도구, 공사용 거푸집 등이 보존되어 건축 및 생활환경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훼손 상태가 심하여 시급한 보수가 필요한 상태이다.

순천선교기지는 이전 선교기지의 다양한 경험을 마스터플랜에 반영하였으며 설계에서 시공까지 한국의 취락 구조나 도시 질서 체계와는 다르게 구축되었다. 입지 조건이나 배치에 있어서 선교사의 경험적 요소인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는 곳, 한국 건축의 권위적 위상 또는 종교적 상징성과 연계할 수 있는 대지 조건 등이 반영되었다.

남장로회의 선교기지 역시 각 도시의 상징적 특징으로 남아 있다. 1910년 설립이 결정된 순천선교기지는 활동지역이 순천시, 여수시, 광양시, 보성군, 곡성군, 구례군 그리고 경상남도의 하동군과 남해군까지 이르렀고, 선교기지 면적은 조선시대 전통 도시 공간인 순천읍성의 규모와 유사했다. 그리고 한국인의 관심을 이끌었던 선교 건축은 선교 관계자들의 주거 건축에도 반영되었다. 선교의 수단으로 시작된 교육과 의료 분야는 1930년대 도시를 대표하는 공간으로 소개될 만큼 도시사회에 미친 영향력이 컸다.

윌슨 선교사가 양성한 다양한 전문 인력은 부산의 선교 시설 건축에서 능력이 입증되고, 1926년에는 한센인 질병 공동체 마을을 조성하고 관리하였다. 그들이 습득한 근대 건축 수법은 순천선교기지의 학교, 휴양시설, 주거 건축에 그대로 반영된다.

순천선교기지의 하계 휴양시설 가운데 먼저 구축된 노고단의 수양관 마을은 일제강점기와 분단 상황의 시대적 상황이 반영되면서 그 잔해만 남아 있다. 하지만 선교사 부인인 플로렌스 헤들스톤 크레인이 1931년 이곳 일대의 자생식물을 조사한 후 『한국의 들꽃과 전설』을 집필해, 한국 식물의 이름과 의미를 영문으로 번역하여 전설과 연계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1962년 노고단 수양관 마을의 대체 마을이 왕시루봉에 조성되어 현재까지 한국 선교 역사의 시대적 상황을 잘 간직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선교사 철수로 선교병원 운영은 중단되지만, 한국인 종사자들에게 습득된 의술은 공공의료, 의학교육 분야 등으로 확산된다. 1960년 개원한 순천기독결핵재활원은 의료선교의 새로운 영역으로 결핵 퇴치에 크게 기여한다. 한센인 치료를 목적으로 건립된 질병 공동체 마을의 병원은 한센병의 퇴치로 일반인을 치료하는 병원으로 전환되었다.

1980년 이후 선교기지의 시설들은 현재 호남기독학원, 여수애양원, 순천시 등 각 관리 주체로 이전되면서 건물의 용도가 바뀌기도 하지만 선교 시설이라는 고유의 기능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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