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600372
한자 關防遺蹟
영어공식명칭 Gwanbang Archaeological Site(Defense Outpost Remains)
영어의미역 Gwanbang Archaeological Site(Defense Outpost Remains)
영어공식명칭 Gwanbang Archaeological Site(Defense Outpost Remains)
분야 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순천시
시대 고대/삼국시대
집필자 박태홍

[정의]

전라남도 순천시에 있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설치된 성곽과 봉수.

[개설]

순천시는 남해안에 접해있으며, 북쪽으로는 호남정맥의 끝자락까지 포함한다. 이러한 지형 구조로 해안에서 내륙으로 연결되는 교통로가 발달하였고, 많은 관방시설이 설치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순천시는 삼국시대부터 거점지역으로서 관련 관방시설이 지속해서 설치된 지역이다. 성곽의 경우 삼국시대 검단산성, 난봉산성, 성암산성을 시작으로 단계적으로 해룡산성, 봉화산성, 인제산성, 오성산성, 조선시대의 순천부읍성, 순천 왜성 등으로 이어진다. 봉수 시설의 경우 중앙으로 연결되는 직봉은 설치되지 않았으나, 관련된 간봉시설인 성황당산 봉수, 개운산 봉수, 학산리 봉수 등이 설치되었다.

[삼국시대]

삼국시대 성곽은 주변에 넓은 뜰이나 하천을 끼고 있으며, 이러한 뜰이나 하천을 향해 돌출된 부분에 위치하여 평지에서의 시인성이 높은 지역에 위치한다. 이러한 점은 순천 지역에서 확인되는 백제시대 성곽도 같은 양상을 보인다. 그리고 성곽이 축조된 지역은 지속적인 거점지역으로서 역할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순천 지역에서 확인되는 백제 산성은 순천 난봉산성, 순천 검단산성, 순천 성암산성 3개소로 산성 간 거리는 15~25㎞ 내외이다. 이와 같은 간격은 다른 지역의 경우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데, 상호 의지하고 호응하여 적의 침입 시 서로 연계하여 수비하기 위한 배려로 판단된다.

성곽과 군·현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전라남도 동부 지역의 동쪽과 해안선에 백제 군·현의 행적 조직상에서 1~3개소의 산성이 배치됐지만, 내륙 쪽은 수량이 급격히 감소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산성의 배치와 관련하여 입지상 군사적 중요지역인 교통로나 국경 지역에 설치되었기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곳에서 확인된 산성들은 서로 근접한 지역에 위치하며, 성벽의 규모가 비교적 작은 편에 속하는 특징을 보인다. 반면 내륙 쪽에서 드물게 나타나는 산성은 규모가 상대적으로 크며, 백제 행정 체제상에서 군으로 정해지는 지역에 해당한다.

[통일신라~고려시대]

통일신라시대의 산성은 이전 시기에 축조되어 지속해서 사용되는 경우와 통일신라시대에 축성된 산성으로 구분된다. 광양마로산성의 경우 백제시대에 축성되어 지속해서 사용됐지만, 순천 지역에서 확인되는 순천 오성산성, 순천 봉화산성, 순천 해룡산성 등은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축성되어 사용된 경우이다.

그리고 백제시대와 구분되는 점은 상대적으로 높은 지역에 성곽이 축조되거나 평지에 가까운 곳에 축조되는 양극화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성곽의 규모는 대규모화되며 평지에 가까운 곳에 축성된다. 또한, 성벽의 축조 또한 삼국시대의 경우 석축성에서 통일신라시대 이후 토축성이 축성되는 때도 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성곽은 행정적 기능이 높은 읍성과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수영성과 진성 등이 축조된다. 이와 관련하여 순천 지역은 순천부읍성낙안읍성이 축조된다. 각기 지역의 중심지에 축조되는데, 평지에 자리 잡고 있고, 축조방법에서는 중앙관리를 통한 규격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특징과 차이]

시대별로 살펴본 성곽의 입지는 기본적으로 거점지역을 중심으로 축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지만, 세부적으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삼국시대의 경우 거점지역의 주변 지역과 교통로 상에 축조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 이후부터 고려시대까지는 지역의 거점 주변에 축조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 시기에는 행정적으로 직접적인 연관성은 갖기 힘들다고 볼 수 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축성된 성곽은 대부분 주변에서 성곽의 위치를 파악하기 쉬운 곳에 있다. 산성의 경우 산 정상부에서 사면부까지 걸쳐 성곽이 축조되지만, 교통로나 거점지역을 바라보는 지형에 위치하여 조망이 쉽다. 성곽 규모는 삼국시대에 성벽의 둘레가 약 500m 이하인 경우와 600m 이상인 경우 등 2가지로 크게 구분된다. 이는 성곽이 축조되는 지역의 행정적인 규모에 따라 어느 정도 규격화되었음을 보여준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면서는 기존의 성곽을 이용하거나 새롭게 축성된 성곽의 경우 일정한 양상을 보이지는 않는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면 대규모의 성곽이 축조되는데, 성벽의 축조방법에는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성벽 둘레가 1,000m 이상인 성곽이 현재의 시·군 단위에 1개소 이상 축조되었다. 조선시대는 중앙의 직접적인 관리 아래 규모나 구조 등이 일괄적으로 같이 축조되어 일관성을 보인다.

삼국시대 성곽은 백제 사비기 지방 행적조직 개편과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순천 지역에서 확인된 백제 산성의 축조방법과 축조 시기가 거의 동일하게 확인되며, 입지적인 측면에서도 비슷한 속성을 갖추고 있다. 또한, 문헌 기록에서 확인되는 방·군·성의 각기 행정 조직상에서 축조되는 성곽의 규모가 제한적인 것으로 볼 때, 순천 지역에서도 유사한 속성을 찾을 수 있다. 군 지역으로 정해지는 지역인 삽평군[현 순천시]에서 확인된 성곽은 주변지역에서 확인된 성곽에 비하여 규모가 크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군 지역에 있는 성곽 주변으로는 2~3개의 성곽이 배치된 양상으로 확인되는데, 이들 성곽은 접경지대나 해안선을 따라 점으로 연결되는 양상을 보인다. 결과적으로 접경지대를 따라 연결되는 소규모 성곽이 서로 유기적으로 대응하며, 이차적으로 군 지역에 있는 중간 규모의 성곽과 연결되는 양상으로 이중의 방어체계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점을 통하여 삼국시대 성곽의 경우 군사적인 측면에 우선하여 성곽이 축조되었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삼국시대 이후 고려시대까지의 성곽은 중앙의 체계적인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먼저 성곽의 축조방법과 분포양상 등이 일관성 있게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통일신라의 경우 삼국시대의 성곽을 재활용하거나 새롭게 축조하는 성곽의 경우 접근하기 어려운 지형을 채택하여 축조하였다. 이러한 점은 삼국시대 방어체계에서 커다란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파악해 볼 수 있다. 한편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 대규모의 성곽이 축조되는데, 기존의 성곽과는 달리 장기간에 걸쳐 농성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전기에 성곽의 축조기술과 입지 등이 정비되면서 정형화된 양상을 보인다. 그리고 군사적 측면의 성곽과 행정적인 측면의 성곽이 분리되어 설치되었으며, 방어체계 역시 이원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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